▲서대화 수필가
▲서대화 수필가

숲속에 내리는 빗소리가 다감하다.

5월의 햇볕이 찬란한 대낮의 산새소리가 알레그로의 피아노 소나타 라면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감미롭게 흐르는 메뉴엣 이라고 나 할까. 바람 한 점 없이 내리는 빗줄기가 수목들의 대화인 듯 소근 소근 마음까지 적셔주는 오후다.

새로 모종한 고추밭 싹들이 이번 비를 맞고 허리를 펼 것 같다. 바쁘게 할 일도 없지만 앞개울에 늘어난 물도 볼 겸 산길을 내려가 아랫마을 어귀에 이른다. 물기를 머금은 수목들이 한껏 푸름을 더 하는 싱싱한 모습이 보기에 여유롭다.

경사진 언덕길을 내려와 마을에 이르는 첫 번째 집에 박씨 어르신이 사신다. 비에 젖은 하늘색 양철 지붕이 선명하게 반짝인다. 대문 앞 단풍나무아래 우거진 야생화 화단에 빨간색 금낭화가 물기를 머금은 채 고개를 숙였다. 반마지기 남짓한 텃밭이 지난 가을이후에 아무것도 심겨있지 않은 채 제철을 다 보내고 있다.

일전에 어르신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작년가을 김장배추를 심어 내게도 한 두럭 내어 주신 것을 떠올리며

“어르신, 올해엔 텃밭을 놀리시는군요.” 라고 했더니 해수(咳嗽)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고 
“이젠 기력이 따라주질 않아, 언제 하나님이 부르실 런지도 모르고...”

하긴 팔십에서도 후반을 살고 계시니 인간의 계산으로 한다면 과연 여생의 날이 얼마나 될 것인가. 노인의 대답이 맞을 꺼라 는 생각으로 잠시 숙연해 진 적이 있었다.

오늘 비 내리는 오후에도 노인의 빈 밭은 그대로 빗물에 젖어가고 있다. 하긴 농사라는 것이 천하에서 근본 된 일이라고는 하나 엄청난 노고와 땀을 대가로 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니 작은 밭 한 뙈기라도 일구기에 노인으로서는 여간 힘에 부친일이 아닐 것이다.

지난 봄 내 집 앞 작은 텃밭에 감자말 이나 심으려고 땅을 파 보니 그 수고로움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기에 하는 말이다.

작년 여름 ‘이웃집 어르신’이라는 수필에서 이 어른의 이야기를 수필로 옮겨 쓴 것을 본지 본란에 실은 적이 있다. 그 어른과 한 마을에서 살며 교우하는 과정을 진솔하고 담담하게 기술한 내용이다. 읽는 이들이 어떠한 감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것을 한권 전해 드려야겠기에 어르신 댁의 대문을 두드렸다. 국적모를 종의 다리 짧은 개 두 마리가 나를 향해 요란하게 짖는 것이 전과 같다. 어르신이 작업복 차림으로 대문을 열고 나를 맞으신다.

손에는 젖은 흙투성이 코스모스 모종이 잔뜩 들려 있었다. 지금 막 이것을 심기 위해서 대문을 나서는 중이라시며 청초한 모종 한 움큼을 들어 보이신다.

이 댁 울타리 밖으로 무성하던 코스모스는 여름의 끝 무렵에서부터 무서리가 내리는 초겨울 까지 산마을로 오르는 이 길을 애잔한 모습으로 지켜주던 것이다. 가을철 산길을 휘감는 소슬바람이 손짓하며 마음마저 흔들어 주던 코스모스는 해마다 이렇듯 노인의 손에 의해서 심어진 것이었다.

기력이 쇠하여 해마다 짓던 고추농사는 포기한 노인이시다. 언제 하늘의 부르심을 받을 런지 알 수없는 황혼의 노인이 오늘 이 빗속에 엎드린 채 가을 꽃 모종을 하는 것을 보며 또 하나의 성실한 삶의 모습을 보는 듯 해 해야 할 인사를 찾지 못한 채 돌아오고 말았다.

마을 앞 을 지나는 철도의 복선공사가 이루어지면 여름 휴가철의 차량 정체 현상이 완화 될 것이라는 기대를 내 것이 아니라며 다음 세대에게 수혜의 이점을 돌리시는 어르신, 지난번 국회의원 선거에 투표장까지 동행하는 차안에서 인생의 마지막 투표가 될 것이라면서 깊은 감회를 보이시던 어르신, 캐나다에 살고 있는 따님의 초청을 여러 번 거절하면서 노구를 책임져야할 따님의 짐스러워 할지도 모를 처지를 먼저 이해하시는 분,

또한 이분은 당신을 위한 농사일은 접어두면서도 꽃을 모종하는 수고는 아끼지 않으신다. 비를 맞으면서도 올 가을 산길을 오르내리는 이들에게 청초한 꽃의 미소를 주려하는 꽃보다 아름다운 배려에 나는 마음을 숙였다. 나는 이 어르신과 오래도록 교우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앞으로 남은 이 분의 여생은 얼마나 될 것인가. 영육이 강건한 가운데에서 우리의 교제가 더욱 길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숲속을 조용하게 내리던 빗소리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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