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서대화 수필가
▲서대화 수필가

봄이 짙어가는 숲속에 휘파람새가 울기 시작했다. 초록색 구름처럼 피어나는 나뭇잎 사이에서 영락없는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때로는 청아하게 어떤 때는 애절하게 이어진다. 한낮의 맑고 밝은 새소리에 비해 해질녘의 새 소리는 애조를 띄운다. 온종일 계속 되던 이 소리는 잠시 여운을 두기도 한다.

숲에 사는 새 소리는 다양하다. 딱따구리 과 의 새가 나무를 쫄 때는 빠르게 회전하는 기구 음으로 산 속의 정적을 울린다. 오월에 접어들면서 숲은 짙은 색으로 물들고 꾀꼬리 소리가 청아하게 메아리친다. 소쩍새가 밤이 새도록 울고 나면 아침을 노래하는 산새들의 지저귐과 대낮 꿩 소리와 함께 뻐꾸기가 심금을 울린다. 간간이 이어지는 휘파람새 소리에 잊혀 져 가던 기억이 되 살아나 가슴 속을 파고든다.

고려 때 어느 도공 총각과 결혼식을 사흘 앞둔 처녀가 그만 몹쓸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단다. 사내는 그녀의 무덤을 돌보며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그는 죽은 약혼녀를 위하여 아름다운 그릇을 만들었다. 세월이 흐르고 늙어 백발이 되어 자신의 사후에는 무덤을 돌볼 이가 없음을 한탄하면서 그녀의 무덤가에서 그도 죽었다. 그의 시신 옆에 예쁜 도자기 하나가 있었고 그 속에 새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새의 울음소리는 애절한 휘파람 소리였다는데 도공의 넋이 새가 되어 환생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년 전에 내 외사촌 누님이 세상을 떠났다. 간 경화증으로 여러 해 고생을 하다가 병원 치료가 한계에 다다랐고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은 가족들의 지극한 민간요법에도 별 효험을 거두지 못한 채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다. 손위 누님이라고 하지만 일 년이 채 되지 않는 나이 차로 우리는 친구처럼 지냈다.

그녀가 타계하기 한 달 전쯤인 그해 늦가을 그녀가 살고 있는 Y읍으로 향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에 대하여는 아무도 부인 할 수 없어 살아서 마지막 만남 이라는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길을 재촉했던 것이다. 그녀는 병세가 좀 호전되어 퇴원한 것이라며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 모습은 젊고 건강했을 때의 그녀일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도록 심하게 야위어 있었다. 수년만의 해후여서 할 말도,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지만 기력이 미치지 못한 그녀는 눈동자만 반짝인다. 남편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대뜸 J에 대한 소식을 물으며 살짝 웃는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스쳐간 그녀의 미소는 대답을 기다릴 것도 없이 그만 짧은 한숨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냥 말해 버릴까. 그녀가 모르게 사십년 가까이 묻어두었던 사실을 오늘 말해 버릴까 하는 충동을 다시금 누르고 말았다. 병약해진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병색이 짙어 회생 하리라는 기대라곤 할 수 없는 참담한 모습인데 곱게 빗어 넘긴 머릿결에서 옛날의 아름다웠던 모습이 잠시 그녀를 스친다. 무상한 세월 속으로 흘러가 버린 그녀의 청춘을 되새기며 돌아 나오는 마음이 애잔했다.

육십 년대 중반, 그녀의 고향집과 멀지 않은 곳에서 내가 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느 일요일 가까운 군 동기생 J군과 함께 내 외가인 그녀의 집엘 간 적이 있었다. 우리는 스무 세 살이었고 한 살 위의 그녀는 내가 동생이듯 J에게도 내게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했다. 세련되지 않은 갈색 피부와 반짝이는 눈동자 가 은은한 매력이었던 그녀는 여학교를 마치고 집에서 가사를 돌보고 있을 때였다.

J의 주된 화제는 그의 고향인 항구도시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는 도시에 비해 낙후되었지만 고향사람들의 순박한 인심에 애정이 간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청춘의 한 때를 보냈다. 군인이라는 신분으로 국가의 부름에 매여 있기는 했어도 스무 세살 젊음의 열기는 군 생활의 고단함 보다는 즐겁고 행복한 나날이 더 많던 시절이었다.

병영에서 한 주간을 보낸 토요일 오후가 되면 그녀가 우리 부대 앞으로 찾아오기도 했고 별빛 곱던 여름밤 그녀의 마을 앞을 흐르는 남한강 상류의 흰 모래밭에 앉아 낭만에 젖기도 했다.

제대를 일 년쯤 앞둔 1967년 초에 친구 J는 월남 파병에 차출되어 특수 훈련을 받기 위해 강원도 오음리 로 떠났다. 군 에서 사귀게 된 친구였으나 그 와의 작별은 내 지체 중 하나를 떼어 내는듯한 아픔이었다.

월남에 파병된 사실을 그녀에게는 비밀로 해 달라는 J의 부탁을 나는 성실하게 지켜 주었다. 1년 후 돌아와서 제대를 하고 그녀에게 청혼을 하겠노라 던 그였지만 결론을 이야기 하자면 그는 그해에 전사하여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은 한강물이 내려다보이는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 안장 된 채 무한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소식이 없는 J에 대한 궁금증을 그녀는 내게 하소연 했다. 그가 다른 부대로 전출된 이후엔 내게조차 소식이 없다는 거짓 답변으로 일관 했는데 그 충격적인 사실을 받아드리기엔 너무나 약하고 순수한 감성을 가진 여인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제대와 함께 바빠진 나날로 J에 대한 아픈 기억은 점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맺어질 수 없다는 첫사랑의 속설쯤으로 매듭짓고 인생 수첩에서 지워버렸을 줄 알았던 그녀의 순정은 아마도 평생을 J에 대한 미완의 사랑을 그리며 살아온 듯싶었다. J의 죽음으로 소식이 끊긴지 1년쯤 지난 봄 날 노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이웃도시인 Y읍의 한 청년과 결혼을 한 그녀에게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 함구 한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

휘파람새의 울음소리가 끊어졌다가 또 이어진다. 결혼을 앞둔 약혼녀의 죽음으로 평생을 수절했다던 전설속의 도공은 한 마리 새가 되어 못 다한 사랑을 나누었을까. 휘파람새의 애절한 울음소리에 자꾸만 마음이 쓰인다.

"J는 아직도 소식 없지?" 운명하기 한 달 전쯤 그녀는 내게 그렇게 묻고 그 겨울을 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사랑을 꽃 피워보지 못한 채 불귀의 먼 길 떠난 옛 친구 J와의 못 다한 이야기를 그들은 저 세상에서 이어가고 있을까.

햇빛고운 산마을에 휘파람새는 오늘도 애절하게 울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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