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천광노 학당장
▲천광노 학당장

승자와 패자의 희비교차는 말과 글로 어떻다 하기 어려워 당선의 기쁨보다 낙선의 쓰라린 고통이어라, 죽어본 사람만이 안다는 식으로 글재주 암만 좋아도 턱에도 못 미칠 것이다. 잔치판에서 미끄러져 울어야 하는 괴로움... 이에 이번 총선에서 낙선한 후보들을 위로할 겸 독자와 만날 생각이다.

우선 무슨 말이 귀에 걸리고 무슨 글이 눈에 들어오겠는가. 세상이 부끄럽고 스스로가 얼굴들고 나가 누구를 만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선거캠프에 나갈 생각도 없지만 그래도 죽은 목숨이 아니니 지지자들께 예는 지켜야 한다고 나가지만 속이 속이 아닐 것이다. 그럴 줄 알기에 한가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읽다 보면 입맛에 맞을 것 같으니 받을 만한 위로가 되기를 바라면서 기운을 내 끝까지 읽어보기 바란다.

1867년 월남 이상재는 열 여덟의 나이에 과거에 응시한다. 당시 과거제도는 고려시대 쌍기가 원나라에서 들여와 조선이 관료등용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았던 제도 였다.

조선말기에 접어들고 고종이 26대 임금이 되자 나중에는 없애버린 것과 다르지 않았으나 고종의 나이 13세 등극에 이제 16세인 집권초기에는 과거제도를 유지하여 월남 이상재도 관직에 나가려 9세부터 준비해온 응시였다. 그러니 국회의원에 출마하고 낙선한 분들도 최소한 9년에서 많으면 20년까지 얼마나 준비를 했을지 그 속 아마도 부인만이 좀 알지 않을까 싶다.

기실 과거응시는 정당과 무관하다. 당시는 소론 시파와 벽파가 집권 측이었으나 향시나 초시에는 여야 정당과 같은 계파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월남 선생은 공부만 잘하면 합격할 걸로 믿었지 무슨 향시 초시 복시에 정파의 입김이 그렇게 크게 작용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입김이 강했다.

당시의 과거제도는 지역에서 치는 향시(鄕試)를 거쳐 지방감영에서 치루는 초시(初試)에 합격한 사람을 다시 한 번 거르는 복시(覆試)까지 거쳐야 종9품 관직을 얻게 된다. 일단 초시까지만 붙으면 진사(進士)라는 감투가 붙어 관직에 나가고 않고를 불문하고 진사어른 또는 초시영감이라 불러주게 돼 있어서 초시는 엄청난 힘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이런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부터가 양반의 후예라야 하기에 상위 5% 특권층이나 아무리 풀어준 안동김씨 세도시절이라 하여도 15% 이상은 늘려주지 않았다. 진골이냐 성골이냐를 따지듯 응시자격을 주는 것이다. 현실 국회의원 후보자는? 확풀려 누구나 출마하지만 정당이나 무소속이나 돈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것이 과거에 붙는 실력보다 비슷하냐, 우위냐?

하여간 열여덟 월남 이상재는 3년 전 결혼한 아내와의 신혼에서 그깟 합격은 걱정조차 하지 않았다. 문제는 초시가 3년에 한 번으로 정해져 때를 기다리며 전 해 향시 합격자만이 초시 응시권이 있으므로 열일곱에 향시를 보는데 향시는 사는 고장 한산에 있는 한산향교에서 친다. 결과는 장원이다. 그러나 향시는 지금의 예비후보 등록과는 다르지만 그정도로 별 무게가 없다. 일단 합격, 그것도 최고 점수였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이런 식으로 각 도별 합격자는 정해져 있어서 100명 50명 이런 식이고 향시에선 10명 명 정도를 뽑았는데 그런 다음 해 공주로 가서 초시를 보게 되자 기대를 잔뜩 가지고 내년에 복시를 보고 관직에 나갈게 아니라 좀더 공부를 해서 스무살이나 스물한 살 쯤에서는 그야말로 어사화를 머리에 쓰는 어전시(御殿試)를 본다고 꼬누다가는 아니지, 내가 성균관에 들어가 더 공부를 해서 완벽하게 관시(館試)쪽으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다, 일단 초시 복시를 붙은 다음에 생각하자 하는 중인데 아뿔사 초시에서부터 장원은커녕 차석도 못하고 덩그렁 낙방하고 만다.

낙방한 이유가 스승님께 배운바 조선의 과거제도에는 그놈의 부정시험이 너무나도 많아 다 셀 수도 없는데 시험지를 밖에서 가져와 바꿔치기 하는 것도 있다고 한 그런 대술(답안지바뀌치기)을 눈으로 보게 된다. 그런데 바로 그자가 장원급제를 하여 풍장을 울리다니 돈으로 과거시험관까지 감영에 어디까지 꽂혔는지 모르지만 분명 부정투성이라는 사실을 알고 길길이 뛰고 감영으로 뛰어 들어가 이를 고발한다고 날뛰며 분을 참지 못하였으나 그러다가는 두 번 죽는다 싶어 포기하고 스승님이 계신 마곡사로 돌아온다. 풀이 죽어 스승을 뵙게 되는데 사실 장원급제자는 시험지를 바꿔쳤다며 낙방한 사실을 아뢰자 일정 스승이 반색을 한다.

“에 그참 상재야 그 시원하게 잘떨어졌다. 살아 난거야~” 참 엉뚱한 말을 듣게 된다. 영문을 모르는데 스승은 툭툭 다음 말을 던진다. “풍장치고 말 타고 춤추는 부정 장원급제가 형장에 끌려가는 죽음의 서곡이 된다는 것 너 모르느냐?”

무슨 소릴까? 정당하지 않게 장원을 하는 것보다는 낙방이 낫다는 것이며 낙방을 해야 세상을 알고 정치를 알고 내가 무엇을 할지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정치를 할 것이냐 아니면 농사를 지을 것이냐... 물론 지금 총선낙선자 경우는 아니지만 고배라는 의미에서는 공통붐모가 있을 것이다.

일단 여기서 줄이면서.. 그후 월남 선생은 영영 과거를 보지 않았다. 대신 진정한 나라를 위한 정치가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더더욱 학문에 전념 정치를 배우게 된다. 월남 선생이 나중에 얼마나 큰 정치인이 되었는가는 그분의 일생 78년 생애를 공부해 보면 대한민국 건국의 할아버지로 3.1민족대표 33인을 선별해 극비리에 대한민국 건국의 씨앗이 되는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의 토양을 만든다. 국부(國父)보다 더 존귀한 국조(國祖)가 되신다.

무학과 같은 과거 낙방사자가 종2품 의정부참찬이라고 하는 정승판서급에 올라가고 특히 대한민국 건국의 토대가 되는 조선최초의 전국민 의무교육의 시초 초대 학무국장이 되어 100% 전국민 교육정책을 입안하였다. 누구나 학교에 갈 권리를 미국에서 들여왔고 정치제도와 삼권분립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 독립협회를 운용하였다. 이승만 서재필 윤치호는 바로 월남 이상재 선생의 수족같은 직속 제자들이다. 이들을 움직여 대한민국건국정신, 즉 상해임시정부태동의 원인이 된 31독립운동정신의 총괄기획 연출 감독으로 진두지휘하였는데 이의 원동력이 바로 독립협회였다. 서재필의 독립신문과 독립문 건립에도 의정부 학무국장 겸 총무국장 월남 이상재의 결재가 국민모금도 허락한 것이다.

지면 한계 상 여기서 줄인다. 줄이면서 하려는 말은 국회의원에 재도전을 하든 아니면 다른 길로 가든 본심은 애국애죽 나라사랑 국민사랑 국가와 우리지역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겠다고 한 결의에서 출마한 것 맞나? 그런데 낙방했단 말이냐? 그러면 돌아서 가면 된다.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4년을 다시 쌓든지 아니면 국회의원 말고 뭔가 더 좋은 나라사랑 국가를 위한 봉사는 없겠는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월남 이상재 선생의 일대기 5권, 필자가 쓴 것이지만 낙선위로 심정으로 추천하니 당선되고 나중에 쇠고랑찬 의원들 허다하니 낙선은 재도약의 디딤 발판이 되어야 한다. 힘을 내고 절대 낯뜨거워하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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