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시농업기술센터 기술보급팀이 분갈이 등 화분관리 요령을 교육하고 있다.
계룡시농업기술센터 기술보급팀이 분갈이 등 화분관리 요령을 교육하고 있다.

문상을 가기 전날 밤은 세찬 바람과 함께 많은 비가 내렸다. 봄비치고는 꽤 많은 양이어서 떠나는 이의 못 다한 사랑에 대한 아쉬운 눈물일 거라는 생각도 했다.

망자를 보내는 슬픈 마음으로 빈소를 지키는 가족들에게 그 밤의 빗소리는 얼마나 참담했을까. 연전에 남편의 발병사실을 담담하게 전하던 그녀는 지금껏 가슴 속으로만 애태웠을 뿐 우리들에게 낱낱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따금 남편과 국내외로 여행을 다니면서 찍어 보여주는 사진은 보는 이들에게 이별을 준비하는 추억여행이라는 예감을 주는 것이어서 행복해 보이기보다는 아련한 연민을 느끼게 했다. 그러던 그녀가 결국 남편의 부음을 전해온 것이었다.

동트기 전까지 퍼붓던 봄비는 아침이 되면서 그쳤다. 지방도시 외각에 자리한 요양병원 장례식장 주변으로 진분홍색 철쭉꽃이 만개해 있다. 인생을 살다가 지금의 우리처럼 문상객이 되어 이곳을 오기도 하고 종당에는 사랑하던 사람들의 헌화를 받는 주인공이 되어 누워있을 곳. 그러나 언제 오더라도 가벼운 거부감으로 외면하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상을 당하고 슬픔에 젖어있는 유가족들이나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의 마음과는 상관없게 짙푸른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목가적으로 흐르고 싱그러운 바람은 부드럽게 꽃향기를 날리고 있다. 그곳이 장례식장만 아니었다면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청명한 날이다.

남편을 영안실 차가운 냉동고에 눕혀 놓은 적이 없는 우리가 그녀의 심정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그녀의 검은 상복에 드리워진 슬픔을 인간의 언어수단으로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동행한 친구들이 말없는 허그로 인사를 대신한다.

때로는 말보다 가슴과 가슴으로 느끼는 온기로 인해 더 큰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낸 서러움으로 여태까지 울먹였을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한다. 문상객의 숫자만큼 유가족의 슬픔을 나누는 것이라면 최소한 우리들 네 친구들의 몫만큼은 덜어 졌을 는 지도 모른다.

생전에 잉꼬 새처럼 서로 아끼면서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었다는 이 들 부부의 작별은 그렇지 못한 부부의 경우에 비해서 사뭇 컷을 것이다.

수차례에 걸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어도 이번만은 비장한 각오를 했을 것이다. 병원 체류기간이 길어지고 점차 쇠약해지는 자신을 돌아보며 그분은 남아있는 생존의 시간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눈치로 알았을 것이다.

게다가 장성한 두 아들은 직장에 이미 휴가를 얻어 환자인 아버지와 함께 같은 병실에서 기거 했다하니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마지막 시간을 어찌 깨닫지 못했을까. 그녀는 임종을 눈치로 알고 있을 남편을 품에 안고 생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사랑의 밀어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나는 평생을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 최대의 행복이었지요.”
“우리가 지금 헤어진다면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어요. 그 동안 먼저 가서 편하게 지내고 있으면 나도 머지않아 당신 따라 갈 꺼예요.”

“우리가 함께 살면서 해야 할 일은 다 했잖아요. 두 아들 모두 잘 키웠고 나름대로 성공해서 잘 살아가고 있으니 우린 행복한 편이예요. 막내도 두 아들을 낳아서 우리에게 손자를 안겨주었으니 우리는 행복한 가정이잖아요. 안심하고 편히 가세요.”

“당신이 있어 내 일생은 행복 했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녀는 두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도 남편을 품에 안은 채 진솔한 사랑의 고백을 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 살아오는 동안 가장 진실 되고 숭고한 마음으로 고백한 사랑을 아마도 그 역시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어 받아 들였을 것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 기력이 다했기에 그의 귀 가까이 말하고 들으면서 미세한 목소리의 대답과 함께 흐르는 눈물을 확인 했다고도 했다.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수명이라면 가는 길에 행복한 감정을 가지고 떠날 수 있도록 한 것은 보내는 이로서 최대한 사랑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몇 번의 크고 작은 수술로 병원 신세를 지면서 여기까지 왔다. 산소 호흡기를 부착하고 누워 있을 때 아내는 내 병상을 지켜주었다.

목숨이 위독한 상태는 아니었더라도 병원 옷으로 갈아입고 병상에 누우니 자연히 혈기는 사라지고 양순한 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엔 끝없는 잔소리로 귓전을 괴롭히던 그녀 역시 착하고 자상한 아내로서의 할 일을 달갑게 실천해 주고 있었다.

때때로 젖은 헝겊을 입술에 대주어 수분을 공급해 주기도하고 움직이기 힘들어 하는 팔다리를 주물러 주기도해서 과분한 호사를 누린 적이 있다. 아내의 간호를 받는 남편들의 순하고 연약해 지는 현상은 모성의 사랑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침상에 누운 불편한 상태에서도 자못 평안한 시간을 보내던 나는 평상시와는 또 다른 안락함을 느꼈다. 이대로 그만 인생의 종말에 이른다 해도 아내가 곁에 있어 행복한 임종을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녀가 남편에게 모성의 본능으로 마지막 사랑고백을 했을 때에 그 역시 내가 느꼈던 평안함과 행복감을 느꼈을 것이다.

떠나가신 그 분은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났으며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온 동갑내기라고 하니 생각하고 추구하는 정서 또한 비슷할 것이라는 내 판단에서다. 그 분은 지금쯤 그가 믿는 신앙에 의해 천국에서 영생의 기쁨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모든 장례절차와 유골 안치에 대한 과정을 마친 그녀는 피곤한 몸 그대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하늘에서 주시는 위로와 평강의 은총이 함께 하기만을 바라며 내내 안락한 삶을 살아가기 바란다.

호반의 도시, 비온 뒤의 짙푸른 하늘에 구름은 흐르고 만개했던 벚꽃이 반쯤 떨어진 4월의 하루. 간간히 불어오는 강바람에 남아있던 꽃잎이 산산이 흩어지고 있다. 인생이나 벚꽃이나 피었다가 지는 것은 자연의 자연스러운 조화인 것을 어찌하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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