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화 수필가
▲서대화 수필가

옷이 날개라는 말은 상식적인 얘기다. 몸에 맞는 좋은 새 옷을 입으면 날아갈 듯 상쾌하고 사람들의 시선에도 당당해 진다. 그러나 옷차림이 주위 환경과 어울리지 않거나 초라하다 싶을 때는 마음가짐이 위축되기도 한다.

입고 있는 의상에 따라서 행동에 제약을 받기도 하고 긴장의 끈을 풀어 편안하기도 하다. 품위 있는 옷차림에 행동마저 신중하다면 인격적인 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생산직 현장에서는 작업복을 입어야 심신이 편하고 지체 높은 어르신을 찾아뵙거나 예를 갖추어야할 때의 의상은 거기에 걸맞아야 한다.

옷차림은 그 사람의 직종이나 인품을 나타내기도 한다. 외모가 반듯한 사람이라도 입은 옷이 허술하거나 천박한 차림새 일 때 그의 인격은 그만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보기에 다소 빈약한 인물이라도 입은 옷차림이 단정하고 세련되었을 때 사람들은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가 있는 이 라 해도 예비군 복을 입으면 행동이 다소 소홀해 지기도 한다. 옷과 옷차림은 그렇게 중요하다.

언젠가 외출 중에 가까운 친지의 상사를 접하고 문상을 갔던 일이 있었다. 여름철이라 반소매 남방셔츠를 입었는데 공교롭게 붉은 색 계통이었다. 다른 조문객들의 검은 색 정장에 비해서 얼마나 부끄럽고 민망스럽던지 난처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다가 이내 돌아섰던 일이 있다.

TV드라마에 출연하는 연기자들을 본다. 그들이 농촌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연기할 때는 아무가 보아도 농부이며 시골 아낙이다. 또한 법복을 입고 출연하면 판검사와 같고 수녀 복 이나 神父옷을 입고 출연하면 영락없는 성직자와 다를 바 없다. 역시 옷차림으로 인함이다.

춘천시 인근 산골마을에서 무의탁자 보호 시설을 운영하는 여동생이 있다. 수년 전 추운 겨울날 관청으로 병원으로 또는 행려 노인이 있는 어느 곳이고 뛰어 다니는 모습을 가상하게 여긴 집안 어른이 고가의 모피 옷을 선물한 적이 있었다. 따듯하기도 하고 품위 있는 디자인이 상당한 고급품이었는데 그녀는 이것 받기를 극구 사양했다.

비싸고 호사스러운 옷을 입고 소외된 노인들 앞에 나설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고가의 옷은 사람들 계층 간에 자못 위화감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운영하던 공장에서 작업을 돕고 있는데 지역 내 관공서에서 업무 차 방문한 적이 있었다. 마침 연말이라 흰 봉투에 약간의 현금을 넣어 활동비에 보태 쓰라는 인사와 함께 건넨 적이 있었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완강하게 거부한다.

그러면서 “열심히 일하시는 분을 돕진 못하나마 폐를 끼칠 수 는 없다” 면서 작업복 입은 내 모습을 가상하게 바라보는 듯 했다. 중년이후의 나이에 작업복을 입은 모습은 근면과 성실성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측은한 동정심을 유발하기도 하나보다.

오랜 친구 중에 자연목을 이용해 예술적 가치를 지닌 솟대를 빚어내는 조각가가 있다. 충주호수가 절경을 이루는 청풍호반마을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이 친구는 피부색이 약간 검은 편이다.

깡마른 용모에 눈동자는 반짝이지만 그리 넉넉하거나 후덕해보이지 않는 인상이다. 앉아있는 시간보다 일하는 시간이 더 많은 그는 작업복을 주로 입는다. 숯 많은 회색 머리에 장발을 한 그를 처음 대하는 이들 중 혹자는 농촌의 게으른 촌부쯤으로 여긴다.

이 친구는 전통 민속품인 솟대를 주로 제작하여 많은 전파매체에 소개된바 있다. 인근에서는 물론이고 서울 등 중앙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찾아온다. 제천시 는 친구의 손으로 완성된 이것으로 문화단지인 능강 솟대문화거리를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금방 날아가기라도 할  듯한 날렵한 솟대가 마을 전체의 하늘을 수놓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고 아름답게 보인다. 친구는 제천시 에서 아끼는 문화 예술인이 되어 민속예술의 계승과 창작에 힘쓰고 있으나 입고 있는 의상은 늘 작업복이다.

이곳을 찾는 내방객 중에는 자식보다도 젊은이가 많은 수에 이른다고 한다. 그의 작업하는 과정이나 인물의 근황이 이제는 TV를 통해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초창기의 그는 간혹 젊은이들에게 下待에 가까운 호칭을 들을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럴 때 마다 그는 옷차림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늘 조각용 칼과 나무토막을 가지고 씨름하디시피 하는 그가 말끔한 정장의 차림은 생각 할 수가 없었다. 궁리 끝에 그는 간접적인 신분노출을 시도했다.

그는 먼저 거실에 전시된 작품을 감상할 여유를 준다. 전시실 벽에는 유명 미술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전시해 놓았다.

특히 雲甫 화백과 담소 중에 촬영한 스냅사진이나 퇴직하기 전인 미술관장 시절 TV 프로에 출연했던 인터뷰 사진은 더 이상 그를 게으른 촌부로 보이게 하지 않는다. 나는 친구의 계획된 의도를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유명 인사들과 함께 한 정장차림의 단정한 모습은 세련된 인격의 예리한 전문인다웠다. 넘볼 수 있는 상대로 평가하려는 마음을 가졌던 이들도 현직에서 활동하던 사진을 확인한 뒤에는 태도가 정중하게 바뀌는 것을 느낀다는 것이다. 호칭에 있어서도 “윤 선생님...” 으로 달라지더라는 말을 웃으며 내게 전한다. 넉넉히 이해되는 상황이다.

 옷이란 물건의 포장지에 불과한 것일 텐데... 우리는 포장지의 질이나 색상, 그리고 맵시에 따라서 내용물에 대한 가치를 평가하는 우를 범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옷이란 진정 그 사람의 날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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