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화 수필가
▲서대화 수필가

나를 큰 오라버니라고 호칭하는 것으로 보아 좋아 보인다는 말인데 나 역시 젊은 여인과의 시간이 황혼녘의 햇살처럼 새삼스럽기도 했다. 그런데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내 자신을 향한 또 다른 내가 타이르는 것이었다.

“이 사람아, 뭔 짓이야...얼른 헤어져서 들여보내지 않고...”

호젓한 밤길을 걷다가 숲이 우거진 공원 벤치에 앉았다. 등산에 대한 이야기도하고 다음 산행에 대한 정보를 나누는데 가을 밤 시간은 빠르게 깊어간다. 가정과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도 하다가 그녀의 원만치 않다는 성생활에 대한이야기까지 듣게 되었다.

그 아이가 어떤 이유와 목적으로 내게 그와 같은 고백을 하는가에 대해서는 섣불리 해석 할 수는 없어도 나를 진정 어른으로, 인생의 선배로 인정하고 어떤 해법을 찾으려는 相談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러지 않고야 들어내기 쉽지 않은 은밀한 부부간의 잠자리이야기 까지를 숨김없이 털어놓을 수가 있을까. 나는 어른 답게 그 아이를 위해서 도움이 되는 길과 방법을 찾으려 고민했다.

밤이 이슥해 이제 그만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렇지만 크게 괘념치 않는 것으로 보아 그 아이는 그 때 내게 한 여인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남녀 간의 육체적 결합이란 국경이나 신분, 나이와 처지 환경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원초적인 본능이 아닌가. 신앙의 양심이나 도덕적 관념에서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쾌락을 좆는 남성性이란 지적인 감각에 둔감한 단세포적 생명체인 관계로 분위기만 조성된다면 어느 곳의 어느 상대에게도 진입이 가능한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 남녀 간에는 外的으로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사이에서도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시절에도 그러했지만 요즘 젊은 남녀 간 사랑의 행위는 대담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늦은 밤 시간 공원 가로등 불빛이 나뭇잎에 가려진 곳이라면 대개의 젊은 커플이 숨어 앉아 그들만의 행위에 빠져있었다. 민망해 하는 나에 비해서 예사롭게 넘기고 있는 이 아이는 저네들과 동세대로서 정서적으로 근접해 있는 가치관 때문인가.

이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도대체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가. 이 젊은 아이와 지금 어떤 자리에 앉아있는가. 우리는 진정 사랑하기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스킨십의 기회가 아니지 않은가. 이건 아니라는 양심의 소리가 가슴속에서 용솟음치듯 나를 괴롭게 흔들어 대고 있었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귀가를 서두르는 내게 던지듯 했던 그 아이의 말 한마디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다. “선생님, 참 도덕군자시군요.” 그것은 존경하는 의미가 아닌 서운함을 내포한 경멸하는 억양으로 들려왔다. 그 아이가 뜻하는 도덕군자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나는 내 나이에 맞는 생각과 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남자일 뿐이다.

몇 달이 지나 새해가 되고 두 세 번의 산행이 있었지만 그 아이는 나오지 않아 만날 수가 없었다. 봄이지만 잦은 꽃샘추위로 을씨년스럽던 어느 날 밤에 한 남자의 전화를 받았다. 술 취한 음성의 전화 목소리는 정확하게 발음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올바른 이성을 소유 했다고는 볼 수 없었다.

전화의 목소리는 대뜸 그 여자아이 이름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 밤에 걸려온 전화의 목소리가 그녀 이름을 꺼내는 것으로 보아 나는 그 아이에게 어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 진 것이라고 판단을 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물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그랬더니 대뜸 “무슨 일이 일어 난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면서 횡설수설 시비를 걸고 있다.

몇 번이고 끊어졌다 이어진 통화의 내용을 종합해 보자면 이 남자는 그 아이의 남편인데 내가 회장으로 있는 산악회 어떤 회원과 그녀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情夫라는 회원의 이름을 대면서 연락번호를 묻는 것이었다.

지금은 알 수 없다고 했더니 “같은 회원이며 그 모임에 회장이라는 양반이 연락번호를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고 따지듯 묻는 것이었다. 연락처를 알고 있다하더라도 어떠한 상황인지 알 수없는 시점에서 쉽게 알려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원만치 않은 성생활에 대한 불만을 내게 하소연 하더니 마침내 부부관계가 어떤 난기류에 휩싸이고 있나보다. 상세한 내용이야 알 길이 없지만 아마도 불륜을 저지른 사실을 남편이 알게 되었을 것이고 상대 남자의 신원에 대해서도 파악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뿐이다.

만취한 사람의 정확치 않은 발음으로 휴대전화 통화하기가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내일아침 맑은 정신일 때 다시 통화하자는 말로 마무리 짓고 일방적으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신호음이 울렸지만 수신하지 않은 채 스위치를 꺼버리고 통화를 끝냈다. 그러나 술 취함에서 깨어났을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목소리의 주인은 다시는 내 수화기를 찾아오지 않았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나 역시 그 일에 대하여는 얼른 잊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관심을 끊은 채로 여러 날이 지나가고 있다.

복잡다단한 세상에는 수많은 인격체들이 살아가고 있다. 다양한 삶의 방식에 의해서 발생하고 소멸하는 삶의 형태가 단색의 그림과 같을 수야 없을 터이나 그날 밤 내가 불륜의 덫에 걸려들지 않은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늦은 밤, 인적이 뜸한 숲속에서 짧은 스커트 아래로 들어난 젊은 육신이 접근해 올 때 邪念에 치우치지 않고 품위를 지킬 수 있는 理性적인 남성性을 그리 흔하게 만날 수 있으랴. 달콤한 회오리로 변한 그녀의 유혹에 어느 갈대 하나가 품위를 잃은 채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는 상황이다.

나 역시 인생 후반부에 무엇보다도 품격과 명예를 소중히 해야 할 시점에 지울 수 없는 오점과 불명예스러운 작태로 말년을 더럽힐 뻔 했지 않은가. 술 취한 그 목소리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의 이름을 거명했더라면 법적 도의적 책임을 어찌 감당 했을까. 이제와 생각하면 그 밤 의 단호했던 내 행동에 나 자신이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육적인 욕심을 억제했더니 영혼이 가벼워 졌다.

그날 밤 나를 향해 “원만한 성생활을 위하여” 라고 제창(齊唱)했던 건배사를 들으며 공통의 관심사로 인한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들어왔다. 나이 들어 원만한 성생활은 물 건너갔어도 그만큼 자극적이지 않더라도 한 차원 다른 일에서 보람을 찾는다면 그 또한 즐거운 삶이 되지 않을까.

가령 손자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성숙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행복한 감상에 젖는 일이라든가 어느 좌석에서든 남녀구별 없이 윗사람으로서 권위를 인정받는 것,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나 부질없는 욕망에서 벗어나 그 어떤 계층의 사람들과도 자연스레 소통할 수 있는 넉넉해진 대인관계, 적은 규모의 지출로서도 문화 활동이나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는 사회제도, 특히 종교에 심취하고자 하나 정신세계를 끝임 없이 어지럽히던 잡념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홀가분한 일인가.

이것은 본능을 누를 줄 아는 인간만이 누리는 절제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아름다운 노년은 예술 작품이라는 말이 생겨났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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