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속 희망의 싹 틔우며 새로운 희망 제시하다’

지난 1960·70년대 다 같이 힘들고 배고픈 시기였다.

내 몸 하나 가족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었고 주변을 돌아볼 여유는 더 더욱 없었다.
6·25 전쟁은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다. 남은 것은 피폐해진 터전과 갈 곳없이 거리를 떠도는 수많은 아이들, 그리고 빈곤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시기에도 어디선간 조그만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굴곡의 역사를 함께 하며 지난 50여년 간 한결같은 마음으로 청소년과 지역 사회를 헌신해 온 인물이다.
생판 모르는 남을 위해 위해 일어섰던 이가 바로 ‘연기새마을금고 이성원 이사장’이다.

특히 ‘인권’이란 단어가 생소한 시기에 청소년 ‘인권’ 향상을 위해 앞장서 감히 ‘대한민국 인권운동 제1호’라는 표현을 써도 무방할 것으로 이성원 이사장은 여러모로 세종시에서는 유명한 인사다.

본보를 비롯한 여러 언론 매체를 통해 그의 행적은 널리 알려졌고 수많은 수상경력도 갖고 있다.

▲이성원·최정희 부부가  ‘대한민국 나눔대상’ 사회공헌부문 수상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성원·최정희 부부가  ‘대한민국 나눔대상’ 사회공헌부문 수상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60·70년대 힘든 시기… 거리의 아이들에게는 작은 ‘희망’이 더욱 절실했다.
1959년 군대 제대 후 돌아온 고향, 조치원에서 그의 눈에 비친 모습은 거리를 떠도는 고아들이었다. 부모들의 따뜻한 손길은 커녕 배척과 차가운 시선에 익숙한 아이들.

이성원 이사장은 “어린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이렇게 된 것은 다 우리 어른들의 잘못이었다. 이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특히 암울하기만 한 ‘미래’를 걱정했다.
“언제까지나 아이들이 깡통을 차고 돌아다닐 수 없었다. 그들도 언젠간 나이를 먹고 성인이 되는데 그 미래가 지금 현재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뭔가 조금만 희망이 필요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조치원역 역무원으로 근무하던 1960년부터 본격적으로 아이들을 돕기 시작했다.
청소년 선도 및 자립을 위해 조치원역 대합실에 ‘청소년 상담소’를 설립했고, 1963년 BBS연기지부를 조직해 불우 청소년들을 각 기관, 유지 등에 결연을 맺어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으로 청소년들의 자립을 도왔다.

1964년도에는 자신의 땅 544평에 흑벽돌로 된 고아원을 지었다.
이 고아원이 바로 ‘희망원’ 으로 ‘희망’이라는 명칭처럼 이곳을 통해 아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안식처가 마련돼 자립을 위한 구심적으로 작용했다.

또한 ‘희망 4-H구락부’을 조직해 구두닦기, 농사짓기, 토끼·돼지 키우기, 철사 수공품 만들기 등 각종 기술을 가르쳤고 경제적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토끼와 돼지, 닭 등을 무료 분양하기도 했다. 이 과정을 통해 스스로 미래에 대해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 갔다.

그렇게  ‘희망원’을 거쳐 하나 둘씩 자립해 나간 사람들이 지난 40여년 동안 무려 500명을 훌쩍 넘는다. 이들은 공무원, 자영업, 운송업, 회사원 등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당당한 사회구성원을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그들은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면 이 이사장을 찾아온다. 그는 항상 애정을 갖고 도와주려 노력한다.
이런 인연이 계속 이어져 지난 3월에는 이성원 이사장이 부인 최정희 여사의 ‘고희연’에 희망원 출신 ‘희망회’ 가족들을 초청해 따뜻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성원 이사장은 “어리기만 했던 아이들이 벌써 자라 머리가 희끗해지고 손주들의 재롱에 웃고 있는 평범한 아버지, 어머니가 됐다”며 “오랜만에 장성한 자식들이 만나니 정말 즐겁고 대견스러웠다”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무호적자 호적 찾아주기 캠페인을 펼쳤다.
▲우리나라 최초로 무호적자 호적 찾아주기 캠페인을 펼쳤다.

아울러 이성원 이사장은 ‘무호적자 호적 만들기 캠페인’을 전국 최초로 펼친 인물이다.
1965년 당시 호적 없는 청소년들의 수는 12만 명.
그 가운데 병역기피자나 범법자 4만 명을 제외한 8만 명은 호적을 갖지 못해 채 사실상 유령처럼 떠돌고 있었다.

그는 이들을 위해 ‘무호적자 호적 찾기 캠페인’을 벌여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노력한 결과, 법무부는 무호적자들을 구제하는 방안을 발표하고 호적 정리뿐만 아니라 증민등록도 발급받게 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법무부가 수여한 ‘인권 옹호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이성원 이사장을 얘기할 때 그의 선친 이영복씨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980년에 68세로 세상을 떠난 故 이영복씨는 가족보다는 철도 공무원으로서 그 업무에 더욱 충실해 야속했지만 자랑스런 아버지였다.

그는 1950년 6·25 전쟁 당시 조치원 선로 보안원으로 ‘개미고개 전투’에서 미군 사상자가 속출하자 부상병 철도 수송에 적극 나섰다. 대구에 함께 간 대전보선 선로원을 규합 ‘결사대’인 ‘조근반’을 편성, 대구역에서 동촌비행장 간 간선로를 설치했으며 미 군수물품을 신속하게 수송해 군사 수송작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그런 공적은 오랜 시간동안 세상에 묻혀 있었다.
다행히 아버지의 흔적을 정리하던 이성원 이사장이 알게 돼 그의 노력과 철우회 회원 등의 도움으로 외부에 알려져 지난 2008년 4월 58년만에 대통령의 ‘참전유공자증서’를 받았다.

하지만 이에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에게 6·25전쟁 시 미군 환자와 군수물품 수송을 지원한 공로를 인정해 무공훈장을 추서해 달라는 요청한 상태다.

아버지가 나라를 위해 묵묵히 싸웠다면 그 아들은 청소년 인권과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힘든 싸움을 지속하고 있다.

▲이성원 이사장이 학생들에게 강연을 하고 있다.
▲이성원 이사장이 학생들에게 강연을 하고 있다.

■‘사람은 참답고 정답고 아름다워야 한다’…다양한 봉사 및 강연 활동 펼쳐
이성원 이사장은 여전히 분주하다. 아직까지 그에게 남겨진 사명이 많은 걸까.

경제정의실현연합, 흥사단, 한국유권자연맹, 전국시민단체연합 등에서 활발한 운동을 펼치고 있다. 지난 2000년에는 유엔에서 개최된 세계 NGO대회에 한국인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그는 기회가 있으면 청소년들에게 말한다.
‘참답고 정답고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 이는 그의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며 느낀 것을 표현한 것으로 첫째 ‘참다워’야 한다. 바른 생각, 바른 마음을 갖고 바른 행동을 의미한다. 둘째 ‘정다워’야 한다. 부자·형제·사제지간에 사랑하고 존경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아름다워’야 한다는 각자의 위치에서 맡은 바 임무에 충실히 하라는 것이다.

그는 ‘대전·충남 최초 금고’인 연기새마을금고 이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지난 시절 어려운 이들을 위해 봉사해왔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서민 금융기관의 대표주자 중 하나인 연기새마을금고 이사장으로 근무한다는 것도 또 다른 봉사의 연장선상일 것이다.
 

▲이성원 이사장이 대한민국을 이끄는 혁신리더로 선정됐다.
▲이성원 이사장이 대한민국을 이끄는 혁신리더로 선정됐다.

이성원 이사장은 마지막으로
“당당한 사회 구성원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 정말 든든하고 ‘내가 잘못 살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며

“오늘날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아버지 세대를 거울삼아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힘차게 나갔으면 한다”고 그의 소망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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