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의 삶을 위로 받고 싶다면 딱 읽기 좋은 책

 
 

얼마 전 신문에 교실에서 책 보는 학생은 왕따를 당한다 라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일부 특이한 경우를 확대 해석 사회적 이슈를 만들어 보려는 기자의 의도가 다분하지만 책을 읽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학생들까지 전이 됐다는 의도에 공감되는 신문 기사다.

그럼, 왜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하는가? 꼭 읽어야 되나? 소설 원작의 영화나 다른 매체나 기기들을 통해 보면 되는 것 아닌가? 꼭 활자로 된 서적으로만 읽어야 하는가? 책의 줄거리나 작가 생각 또는 요약한 것만 잘 알고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바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꼭 책을 읽어야 되는가?

또한, 이렇게 반문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보를 책 속에서 얻는다? 옛날에야 그랬는지 모르나, 요즘은 책 속에서 정보를 얻는 것 보다 인터넷이나 SNS를 통해 얻는 질 높고 다양한 최신 정도를 빠르고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얻을 있는데 왜 책을 읽나요? 라고 반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부를 많이 하고, 책을 많은 쓰고, 유명 대학에서 강의 하며,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은 한결 같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전혀 다른 삶을 맛 볼 수 있으며, 죽을 때 까지 한번 가 볼 수 없는 곳을 가볼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 듣는 이야기를 책 한권으로 알게 되며, 한권의 책을 읽는 동안 기쁨, 슬픔, 분노, 지루함 등과 같은 각종 감정을 독서를 통해 맛 볼 수 있는데, 이런 맛은 컴퓨터 자판의 검색을 통해 얻는 정보의 질과는 비교 할 수 없다.

이렇게 누차 애기해도, 무경험자들은 계속 궁시렁 궁시렁 반문 할 것이다. 왜냐하면 책 읽기에 시간과 공을 들여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 책 소개 하다 말고 ‘천개의 찬란한 태양’과 ‘독서를 왜 해나’는 무슨 연관성이 있어 송 기자는 이렇게 입에 거품 물며 이야기 할까?

‘천개의 찬란한 태양, 이하 천찬태’을 읽으며, 왜 독서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송 기자에게 명확한 해답을 준 책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책을 읽을 때 몰입 되면서 주인공과 독자가 하나 된다.

대단한 소설을 읽고 나면, 이미 동질화된 주인공과의 작별을 아쉬워 하며 이제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죄스러울 정도로 아파한 적도 있다.

그런 종합적 동질화된 감정의 정보는 책을 읽어서만 얻을 수 있으며 천찬태가 그런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천찬태 책을 읽지 않으면 죽을 때 까지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절대 알지 못하며 혹시 안다고 해도 서남아시아에서 테러가 많은 이슬람 국가? 소련이 80년대 초반 강제적으로 침공해 공산국가가 된 나라? 가끔 뉴스를 통해 얻는 아프가니스탄 이라는 나라의 이미지는 잘 모르면서 후진국, 전쟁, 기아, 폭력, 여성학대, 알카에다, 이슬람과 같은 주로 부정적인 이미지들의 빅 데이터가 주된 인식이다.

그러나 책 한권을 다 읽으면, 아프가니스탄의 근 현대사가 자동으로 독자의 머리로 들어오며 요즘 IS(Islamic State)가 도대체 왜 상식 이하의 테러를 벌이는지에 대한 시대적 배경을 알게 된다. 뉴스에서 IS 관련 뉴스를 보면 이해하는 차원이 달라진다.

그리고 늦은 근대화와 서구의 침략, 이념 갈등으로 인한 사상의 대립 에서 좌?우라는 허상 속에서 많은 국민들이 희생 된 역사적 사실을 보면 과거 우리 선조들의 역사를 다시 보는 듯하다.

둘째, 소설을 읽는 중 착각을 한다. 소설이라는 사실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보내고 주인공들을 실존 인물로 착각하게 만들 만큼 현실적이다. 지금도 아프가니스탄에 ‘마리암’은 살아있고 ‘라일라’와 그의 아이들이 평야를 뛰어 다닐 것 같다.

비행기를 타고 아프가니스탄 카불로 가면 방긋 웃으며 나를 맞이해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등장인물과 독자가 동기화 된다. 이런 등장인물과 감정의 교류는 독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으며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는 절대 얻을 수 없다.

소설 이야기를 하면, 소설 전체적으로 이끌고 가는 주인공은 세명의 여성이다. 사생아 출신 ‘마리암’과 전쟁의 비극으로 가족을 모두 잃고 20살 나이 차이 나는 남자에게 억지로 시집가서 고단한 삶을 사는 ‘라일라’ 그리고 그의 딸 ‘아지자’가 중심인물 이며 작가는 마리암은 과거, 라일라는 현재, 아지자는 미래로 각각 상징 한다.

어린 시절 사생아 마리암은 엄마와 같이 살며 일주일에 한번 아빠 ‘질란’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엄마 보다는 경제력 있는 아빠를 점점 더 좋아 한다.

결국 엄마를 버려두고 아빠 집을 무작정 찾아가 집 앞에서 며칠을 기다리다 결국 만나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집에 돌아온 마리암은 집안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며, 엄마를 찾지만 이미 자살한 후였다.

엄마는 자신의 유일한 동반자인 딸 마저 자신을 버렸다는 자괴감으로 자살을 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마리암은 충격을 받는다.

갑자기 고아가 된 마리암은 할 수 없이 아빠 ‘질란’의 집으로 들어가는데 사생아 출신인 자신이 본처와 배다른 형제들과 살아가는 건 여간 고역이 아니다.

결국, 마리암은 구두를 만드는 ‘라시드’에 억지로 시집을 가며 모욕, 구타, 무시, 차별을 당하며 결혼 생활을 처참히 이어간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슬람 여자들이 사용 하는 ‘차도르’에 대한 마리암의 독백은 ‘차도르’를 하지 않은 독자에게 차도르를 쓴 답답함과 차별을 경험하게 한다.

그러던 중 마리암은 옆집에 사는 딸 정도 되는 ‘라일라’를 알게 되며 얼마 후 그녀의 집에 폭탄이 떨어져 가족들은 모두 죽고 고아가 되 결국 마리암의 남편 ‘라시드’의 첩으로 들어가게 된다.

졸지에 마리암과 라일라는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동서지간이 되며, 초반 둘의 관계는 여성들 사이에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신경전과 다툼으로 확대된다.

그러다 어떤 사건을 통해 둘이 갑자기 가까워지며, 서로 협력하여 살아 갈 길을 모색하며 이야기는 종반으로 치닫는다.

세상 속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 나의 삶을 위로 받고 싶다면 딱 읽기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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