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화 수필가
▲서대화 수필가

승용차를 폐차시키려 한다. 십년이 채 안되어 사람의 나이로 친다면 나 정도쯤 된 듯 해 여기서 버리기엔 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삶의 여정에서 중요한 한때를 함께한 자동차를 폐차한다 하니 서운한 마음이 여간 아니다.

일그러진 곳 몇 군데 판금하고 잡소리 나는 원인을 찾아 손보면 앞으로 수년은 더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자꾸만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현재 사용하고 있는 화물차가 내 생활용도에 맞는데다가 서있는 날이 더 많은 승용차는 결국 폐차하기로 마음을 정 하게 되었다.

편리한 운행을 위하여 설치했던 약간의 장치를 풀었다. 기왕 버릴 것이니 아직도 쓸 만한 물건을 남겨둘 필요가 있겠는가. 운전 중 자동차 측면 死角지대의 형편을 바로보기 위한 볼록렌즈 백미러와 보조핸들, 그리고 소형 소화기와 장식용 작은 나무십자가 하나가 고작이다.

수납장 안에 있는 잡동사니까지 꺼내어 정리하자니 이런 저런 추억이 떠오른다. 자동차로 인한 여러 가지 옛일들이 생각나 낙엽 떨어지는 넓은 뜰에서 일손을 놓고 한동안 괜한 시간을 보냈다.

제조업을 운영하던 시절엔 1톤 화물차를 즐겨 탔다.
연료비가 절약됨은 물론이고 시야가 넓어서 운전하기에 여간 편한 것이 아니었다. 아내는 물론 노모와 이웃들까지 승용차보다 편리한 이점에 대해서 공감하고 지냈다. 그러나 우리 집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몇 년이 지나서였다.

가당치 않은 이유로 승차를 거부하는가 하면 어쩌다가 함께 자동차를 탔어도 불만스러운 표정이 역력히 보이는 것이었다. 승용차 가 아닌 화물차를 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직 철이 들지 않은데다 감수성이 예민할 때이니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싶어 모른 체 하고 지냈다.

아이들이 좀 더 커지고 검은색 중형 승용차를 구입했다. 새로 산 자동차는 우리가족의 충실한 수족이 되어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에 있어서 참으로 긴요한 필수품으로서의 쓰임새를 다했다.

추운 겨울밤, 히터로 데워진 차내의 안락함을 얼마나 감사한 마음으로 운행했던가. 아내와 동행하던 지방 출장길, 호젓한 산길을 돌아가면서 느끼던 행복감은 지금 생각해도 소중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신 노모께서는 내가 자동차 다루는것 보다 더 귀하게 여기신 것도 폐차하는 마음을 아련하게 했다.

반복되는 일상사에 싫증을 느끼던 어느 날 자동차와 함께한 무단가출로 인하여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던 어처구니 없던 기억 등 자동차로 인한 많은 추억들이 수 도 없이 떠오른다.

그동안 자신도 알지 못한 채 미납된 세금이나 과태료는 없는가. 이것들을 확인하기 위해서 자동차 등록사업소를 찾았다. 등록원부 라는 것을 신청하여 내용을 확인했다.

체납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싶어 자신 있게 받아든 서류에서 의외로 압류된 항목이 먼저 눈에 뜨인다. 얼른 떠오르는 기억이 없는데 분명 주민등록 번호와 이름이 본인이다. 1998년 4월, 경기도 가평 경찰서장의 명의로 압류되어있는 내 검은색 승용차. 속도위반으로 인한 과태료 미납이 원인이다.

아직도 아물지 않은 아픈 기억 속에 그날이 떠오른다. 독신으로 살던 누이동생이 있었다. 여동생은 여러 번의 결혼기회를 큰 이유 없이 거부하고 신학대학을 마친 후 전도사가 되었다. 큰 교회에 봉직하면서 선교에 힘쓰던 중에 어려서부터 꿈꾸던 것이었다며 불우한 이웃을 위한 보호시설을 만들기에 이른다.

살고 있던 아파트를 처분한 자비로 춘천시 외각에 나눔의 동산이라는 이름으로 무의탁 노인들을 위한 양로원을 만들었다. 노인들 외에도 정신지체인 들과 오갈 데 없는 어린이들을 위해 의식주는 물론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애써 헌신하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났으나 바쁘게 살아야 하는 일과는 끝이 없었다. 마음편한 휴식의 기회는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고 먼 곳에서 새로 들어오는 식구가 있다면 그 밤을 도와서라도 데려와야 했다. 노인들의 간병과 사망으로 인한 궂은일을 피할 수 없어 피곤이 누적 되었을 것이다.

가족들이 살고 있는 서울 본가를 찾아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병색이 완연한 모습이었는데 그 몰골을 바라보는 형제들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그 생활을 그만 접으라는 주위의 만류를 한마디로 거절하고 되돌아 나가는 모습에는 아무도 말릴 수 없는 단 호함이 있었다.

춘천이라는 먼 곳까지 혼자 보낼 수가 없어 오늘 폐차하려는 검은색 승용차를 타고 함께 동행 하게 되었다. 하루도 비울 수 없는 춘천근교의 나눔의 동산으로 향하는 길에 가평군을 지나게 되었던 것이다.

북한강 물이 내려다보이는 한적한 길을 갈 때였다. 동생의 병세를 확인한 나는 그만 운전대를 더 이상 쥐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미 병원에서는 깊어진 병세를 운명에 맡기라는 위로 아닌 선고를 하고난 후였다고 했다. "오빠. 나 천국 가는 건 좋지만 나 없이 엄마는 어떻게 살아?" 한숨 섞인 절규를 삭이기가 힘들었다.

닥쳐온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순간적으로 가속 페달 을 힘껏 밟았을 것이다. 그때에 속도감지 무인 카메라가 작동한 것이고 이날의 속도위반으로 인한 과태료 납부는 그 후에 닥쳐온 슬프고도 험한 일을 치르면서 까맣게 잊고 지냈던 것이다.

폐차장은 시의 외각 산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갈걷이 뒤의 황량한 빈 밭을 바라보는 마지막 운행은 실로 감회가 깊었다. 폐차 된 자동차의 골체 들이 마치 산을 이루듯이 쌓여진 폐차장 한쪽에 자동차를 멈추었다. 십년가까이 손에 익은 열쇠를 받아든 종사원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사무실로 가라는 말을 턱 짓으로 대신하곤 그만이었다.

그 많은 자동차의 유해들은 다른 많은 폐차들과 어울려 어디론가 떠나 버릴 것이다.

내 인생의 중요한 한때를 함께 했던 자동차는 그리운 추억과 함께 사라져 갔다. 그러나 내 곁을 떠나간 것이 어찌 자동차뿐이랴. 사람도 추억도 그 시절도 모두 내 곁을 떠난 것이 서글픈데 이 가을마저도 내게서 떠나가고 있는 것이 자꾸만 아쉬워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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