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화 수필가
▲서대화 수필가

가까이 지내는 선배의 부친께서 돌아가셨다. 수년 전에 아흔을 넘기셨는데 노환으로 일주일쯤 누워 계시다가 어제 새벽에 운명하셨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구구팔팔이삼사 라는 어른들의 희망을 몸소 실행에 옮기신 어르신께서 돌아가셨다. 함께 문상 온 동료들이 권하는 두어 잔의 소주를 마신 탓으로 기분은 적당히 가벼워졌다.

우리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주제로 이야기했다. 인생의 후반부를 내려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죽을 것이냐 하는 것이 더 큰 관심사가 되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짊어지고 사는 것이라고 하지만 죽음의 형태에 대하여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 돌아가신 어른처럼 갈 수 있게 되기를 모두가 염원하고 있었다. 발인절차를 논의하는데 들어보니 내일아침 화장으로 모신다는 것이다. 근래 장례방법이 매장에서 화장으로 변화된 것은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나 그 가족들에게 주는 뚜렷하게 좋은 영향이지만 잠시 의아해 하는 우리에게 선배는 해명처럼 이야기한다. 고인의 평소 뜻이 화장을 원하셨으며 유언도 그리 하셨다는 것이다.

자손들도 모두 선친의 유지를 따르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바람직한 선택을 하신 어르신과 가족들에게 마음속으로 경의를 표했다. 선산이 있고 또 공원묘지에 모실만한 재력이 충분한 입장에서 화장을 택하기는 쉽지 않았으리라는 판단 때문이다.

매장이라는 장례문화가 국가시책에 어긋나는 것뿐만은 아니다. 좁은 국토, 여의도 면적의 몇 배가 묘지로 잠식된다는 통계상의 수치, 삼천리가 묘지 강산이라는 등 비아냥거림의 문제만도 아니다.

조상의 묘를 역사에 길이 남겨 후세에 까지 보존할 가치가 없는 것이라면 수백, 수천 년 간 고분으로 남겨둘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묘를 열고 유골을 수습하고 화장을 해서 진정 흙으로 되돌려 드려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내 생각이다. 그러나 과정의 일들이 후손들에게 심적 혹은 물적으로 여간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니다.

내 외가는 어머니 대(代)에서 절손(絶孫) 되었다. 외조부께서는 그 시절에 개명된 방법으로 사업을 일으키시어 적지 않은 재산을 모으셨다. 그러나 어느 해 창궐했던 전염병에 아내와 아들을 잃는 시련을 당하셨다. 중년에 접어들어 어린 아들 하나가 딸린 조신한 과수댁을 후취로 맞아들여 다시금 인생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후처에게서 내 어머니와 그 아래 이모를 얻으셨다.

아들 낳기를 바라시던 외조부는 가문의 代를 잇고자 후처가 데리고 들어온 아들을 자신의 성으로 호적에 등재하기에 이른다. 부유한 여생을 보내시던 외조부는 두 따님을 모두 출가시킨 후 돌아가셨다. 뒤이어 내가 외숙이라고 부르던 그는 본래의 성을 되찾아갔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그 외숙의 후손들은 많은 전답을 매각해 버렸다. 탄탄했던 가세는 기울어 졌고 끝내는 우리와의 인척관계마저 끊고 말았다. 이렇게 되어 외가는 절손되기에 이른 것이다.

어머니와 이모 두 분은 평생을 가까이 의지하며 사셨다. 넓은 서울에서 언제나 이웃을 떠나 살지 않았으며 애틋한 정을 나누며 서로 우애하셨다. 부모를 사모하는 정이 스러질 때가 되었건만 자매 분은 그 옛날을 어제일 같이 기억하며 그리워하셨다.

수년 전 초가을, 나와 이종 아우를 앞세운 두 분은 외조부모께서 묻히신 묘지로 향했다. 무성한 잡초 사이에서 간단한 의식을 마친 후 인부들의 손을 빌어 삽질을 시작했다. 해마다 음력 칠월이면 외손에 의해서 벌초 받으시던 무덤이 결국 그 봉분의 흙더미를 파헤치게 된 것이다.

오십여 년이 지나 고분이 된 그 속에서 합장으로 모셔진 두 분의육탈 된 모습이 잠시 햇빛을 보셨다. 바라보기도 섬뜩한 유골이지만 평생을 그리워하던 두 따님의 곁으로 잠시 모습을 들어 내 신 것이다. 두 분의 유골은 곧이어 화덕 속에서 연기로 사라져 버렸다. 연로하여 기력이 떨어짐을 우려한 자매 분께서 생전에 해야 할 정리라고 하면서 실행에 옮기신 것이다.

골짜기로 퍼져나가는 연기를 보면서 노 따님들은 눈물을 글썽이신다. 하얀 유골의 가루를 산바람에 날려드리며 어머니는 내게 말하신다."나 죽거든 화장을 하게. 나로 인해서는 이런 번거로운 일 하지 말어. 분주한 세상에 때마다 조상 성묘 다니기가 그리 쉽겠나?" 그리고는 내가 내 선친 묘에 하고 있는 지금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며 불효하는 아들의 양심을 찌르기도 하셨다. 진정이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반드시 그렇게 해 달라는 부탁을 유언으로 남기셨으나 몇 년 후 나는 그날의 약속을 지키지 못 했다. 허망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 받기 위한 산者의 욕심으로 매장을 고집했던 것이다.

지난 일들을 회상하며 숙연한 마음에 젖는다. 장례식장으로 새로운 조문객이 도착했는지 빈소에 줄지어선 낯선 이들의 모습이 다소 복잡한 느낌이다. 서너 순 배의 술잔이 더 돌았고 우리 일행 모두의 마음은 한껏 열려 있었다.

자신의 나이를 육 학년 졸업반에 비유하는 어느 일행이 말한다. 죽음을 통해서 남들에게 유익을 주는 방법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시신을 대학 병원에 기증하는 것인데 자신은 이미 결정했다며 카드모양의 작은 약정서를 내 보이는 것이다.

연구용 시신이 모자라 의과대학생들이 동남아 국가로 떼를 지어 실습 여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 시신 1구에 실습생 6명이 한 조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실정은 20명씩이나 묶을 수밖에 없다는 형편, 절대 부족한 실습용 시신을 외국에서 수입한다는 생소한 이야기 등 관심 갖지 않아 모르던 딱한 일들을 전해 들었다.

돌아오는 길 혼자서 생각에 잠긴다. 언제일까 내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날엔 하던 일 모두 중단하고 돌아가야 한다. 추하지 않고 고통 없이 가고 싶은 염원은 내 뜻대로 할 수 없으니 그분께 맡기기로 한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 매장(埋葬) 혹은 화장(火葬) 문제에 대하여는 혼란스럽지만 가닥이 잡힌다. 더 바람직한 방법은 시신을 기증하는 일이라 생각하면서 늦은 밤 귀가를 서둘렀다.

눈 섞인 바람이 차갑게 스치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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