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화 수필가
▲서대화 수필가

집 뒤의 골짜기를 따라 상류로 올라갔다. 바위틈을 감도는 하얀 물살은 제법 높은 폭포를 이루기도 하고 작은 소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이따금 등산로를 따라 정상까지 오르며 다람쥐와 청설모의 동행이 되기는 했어도 계곡을 따라 오르기는 오늘이 처음이다. 숨겨진 비경이라도 찾은 듯 신비스러운 마음으로 바위사이 돌 틈으로 물길을 거슬러 오른다. 산으로 거처를 옮겨 산지 한참이 지났지만 오르지 않았던 산길에 이와 같은 풍경이 숨어 있었던 사실이 마치 보석이라도 찾은 것처럼 소중하게 여겨진다.

10월로 접어들자 검푸르던 숲 활엽수 잎 새가 황록색으로 변한다. 채 물러가지 않은 잔서(殘暑)가 한낮의 산마을을 덥힐 때도 있지만 그늘은 한결 서늘해 졌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잡목이 우거진 숲속을 물소리 따라 오르기 한참 만에 발 담그기 알 맞는 바위가 있어 잠시 걸터앉는다. 시원한 냉기를 느끼며 좋은 사람과 함께하지 못 한 것이 아쉽다.

작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지는 폭포 곁에 바람에 흔들리는 젖은 나뭇잎이 싱그럽다. 소리 내어 흐르는 바위틈 풀꽃 사이로 분홍색 물봉숭아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군데군데 피어난 배초향 보라색 꽃은 소박하고 수줍은 모습이다. 화려하지 않아 내세울 것 없는 모습으로 그냥 그 자리에 있을 뿐인데 그것들의 어울림이 자연의 아름다움이다.

산마을에 피어나는 야생화의 소박함이 내 정서에 맞는다. 여름밤엔 새도록 울어대는 소쩍새의 울음소리 그리고 겨울밤 나뭇가지에 쌓인 눈 떨어지는 소리에 묘한 안도의 평안함을 얻으며 살아 온지 여러 해가 지났다. 평생을 시달려 온 도시에서의 복잡한 삶을 떠난 자적(自適)한 생활이 퍽 소중하고 귀하다.

상류로 오를수록 계곡은 좁아지면서 물은 더욱 맑고 깨끗하다. 우거진 숲속엔 산밤의 아람이 떨어져 눈이 모자랄 만큼 흩어져 있고 더러는 풀 섶에 가려 용케 눈길을 피하는 것도 있다. 인적이 뜸한 산속이라 떨어진 열매들은 올겨울 짐승들의 겨울나기 양식으로 넉넉할 것 같다. 몇 개를 주워서 껍질을 벗겨내자 잘 여문 속껍질이 자신의 알몸을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엄지손톱으로 대충 벗겨내자 이내 노란색의 속살이 나온다. 입에 넣어 오도독 하는 소리가 맛보다 더욱 고소하다. 심심풀이로 주운 몇 알을 주머니에 넣는다.

숲속 나뭇잎에 일렁이는 잔잔한 바람결을 따라 하늘을 본다. 상수리나무 가지를 타고 올라간 넝쿨을 자세히 보니 녹색의 작은 다래열매가 수없이 달려 있다. 대추알만한 놈이 있는가 하면 어린아이 주먹만 한 것도 있다. 더러는 땅에 떨어진 것이 있어 몇 개를 주워 흐르는 물에 씻어 입에 넣으니 달고 새콤한 맛이 향기롭기도 하다. 채 줍지 못하고 다음을 기약한다. 소쿠리라도 하나 가지고 다시 찾아와야지....

문득 청산애 살어리랏다 하는 청산별곡이 생각난다. 고교 국어시간을 추억케 하는 얄리얄리 얄랑셩...하던 고려가요는 작자 미상으로 오늘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누군가 속세의 인간사를 떠나 한적한 청산에 살면서 그 산을 찬미한 것이리라. 머루랑 다래를 따 먹으며 자연과 벗하는 선인의 시심(詩心)을 이해 할듯하다. 산은 사람들에게 삶의 기백과 풍요로운 마음을 주기도 하거니와 그 산에 안길 때 포근한 안식과 위로를 받을 수 도 있다. 작자는 시름을 안고 산으로 들어와 자기 나름의 비애를 노래하며 위로 받았을 것이다.

내려오는 길은 등산로를 따라 쉬엄쉬엄 걷는다. 길섶엔 몰래 피어난 노란색 감국이며 하얀색 구절초가 들국화로 피어나 바람에 날리고 도토리나무 아래엔 이미 떨어진 열매가 지천으로 널렸다. 도토리 키 재기 라더니 아무리 큰 놈이라야 새끼손가락 한 마디에도 미치지 않는다. 골짜기 어디선가 도랑물 소리에 섞인 여인들의 목소리가 산길을 타고 내려온다. 가을 산열매를 주우러 올라온 마을 아낙들인 듯싶다.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 다니는 잡종 개 삼월이 년이 소리 나는 쪽을 향해 귀를 세우고 짖는다. 울긋불긋한 등산복 차림의 중년 여인 둘이 가득 찬 배낭을 메고 산길을 내려오다가 나를 보더니 잠시 주춤한다. 반가워야 할 사람과 사람 사이 인데 인적이 없는 산중에서는 서로가 긴장하는 대상으로 변했다.

남북의 대치상황이 살벌하기만 하던 시절엔 산에서 내려오는 낯 선 사람은 대공기관에 신고하도록 되어있었다. 또한 6. 25 한국전쟁 중엔 미처 도주하지 못한 인민군의 잔당들이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으로 변했다. 이들이 주민들을 괴롭히던 시절,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확실한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긴장의 표정을 거둔다. 그다지 영악해 보이지 않는 내 존재를 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짖어대던 삼월이 마저 반색을 하며 꼬리를 치는 것에 안심이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가오면서 눈인사 까지 하는 것을 보면 아랫마을을 지나다니면서 몇 번 마주친 기억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산 채로 돌아오니 가을빛 늦은 햇살이 혼자서 빈집을 지키고 있다. 주머니 주워온 밤톨을 꺼내어 소쿠리에 담고 설익은 다래는 남향 창가에 놓아 해바라기를 시켜 농익을 때를 기다린다. 이번 주말에 나를 찾아올지도 모를 좋은 벗을 위하여 준비하는 마음이 달갑다.

수정 같은 계곡물에 발을 담그게 하고 흐르는 물소리와 바람소리로 시정(市井)의 잡음에 절은 심신을 말끔히 씻게 해 주고 싶다.

청산애 살어리 랐다. 멀위랑 다래랑 따먹고... 작자미상의 고려가요가 자꾸만 되뇌어 지는 일상의 하루가 저물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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