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화 수필가
▲서대화 수필가

그런데 바로 이때 아내의 휴대전화에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네, 네 그런데요. 네, 네 맞아요. 아이고,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맞아요. 현찰도 들어있고 카드도 있어요. 아 네, 잠시 후에 댁으로 갈 께요.”

좁은 차 안이 떠나가도록 큰 소리로 통화를 끝내더니 희색이 만면한 표정이 된다. 듣고 보니 501호 할머니가 어젯밤에 지갑을 주웠는데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잠깐 들여다보니 현찰도 얼마정도 들어있고 카드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줍고 나니 왠지 겁이 나서 더 이상 가지고 있지를 못하고 얼른 경비실에 신고를 하고 맡겨 놓았다는 것이다.

아내의 표정이 금방 해처럼 빛이 났다. 결국 그녀가 마지막이라며 제시했던 방법대로 적당하게 써 붙인 엘리베이터 안의 농담 같은 글귀를 읽고 바로 전화를 걸어 알려준 것이다. 세상의 온갖 근심꺼리가 다 해결 된 것 같고 어둡고도 막막한 터널 안으로 햇볕이 쏟아지는 것처럼 밝은 기분이 들었다.

같은 아파트에 오래 살았어도 이웃을 모르고 지내기는 우리도 남들과 다름없었다. 가끔씩 단지 안에서 손자로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한가하게 서성이는 노인들 곁을 지나치기는 했어도 그들이 어느 동에 사는 주민인지에 대해서 신경도 쓰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이 지내왔다.

그런데 손자를 우리가 맡고부터는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나 어린이 집을 보내기 위해서 아파트 안길을 왕래 하는 일이 많아지고 보니 자연히 같은 처지의 이웃들과 알고 지내게 되었다. 사람 살아가는 방법이나 처해진 형편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우리가 살아가는 내용과 대동소이 한 이웃 들이다.

지금 전화를 걸어준 501호 할머니도 손자아이 양육 때문에 딸 내외와 함께 살고 있다. 그 댁 손자도 우리 아이와 함께 같은 어린이 집에 다니고 있으니 관심사가 같고 생활 패턴도 비슷한 부분이 많아 가깝게 대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도 서로의 이름은 모르고 있었다. 그냥 윤우할머니 또 그 집 아이 할머니로만 기억하고 그렇게 호칭하면서 지내고 있는 중이다. 농사철에는 그 댁에서 심심풀이로 재배했다는 오이나 호박, 그리고 옥수수 포대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 가을에 재배한 총각김치 꺼리 무를 주고받으면서 선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낸다.

501호 할머니는 엘리베이터 안에 써 붙여진 메모에 적혀있는 전화번호를 보고서야 우리 집 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길에서 주운 지갑이 바로 801호 할머니 것이라니 참 절묘하게 되었다며 그쪽에서도 즐거워하고 있단다. 그 지갑 속에는 주민등록증이 있으니 펼쳐 보았으면 알 수도 있었을 텐데 확인할 것도 없이 경비실에 전해 주고 왔다는 그들의 양심은 우리도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 그녀의 심성을 칭찬했다.

아무도 모르게 주운 지갑 안에 현금이 들어있다. 나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액수야 고하간에 사람의 마음을 자칫 바람직스럽지 않은 길 쪽으로 유혹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은 돈의 속성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도 만들고 개인은 물론 사회까지도 병들게 하는 각종 비리도 대개는 검은 돈 때문에 일어나는 사회적 현상이다. 그런데도 501호 할머니는 유혹의 굴레에 빠질 것도 없이 청렴하게 행동했다. 겨울철 저녁 여섯시가 지나서라면 주위는 완전하게 어둠이 깔린 뒤다. 그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양심을 지켰다는 것은 그가 갖고 있는 평소의 인품이나 신념이 아니고 무엇이랴.

고마운 성의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귤 한 박스를 샀다. 신도시 넓은 아스팔트길을 달리는데 상쾌한 기분만큼 페달 밟는 촉감이 상쾌하다. “아까 예배시간에 하나님께 기도를 했더니 역시 빠르게 응답해 주시네.”라고 말했더니 아내역시 기도했다고 한다. 왜 안 그렇겠는가. 동네 근처 마트란 마트는 다 조사했는지 가격이 조금이라도 저렴한 곳만 찾아서 한 푼이라도 아끼며 살아가는 것이 습관이 된 여인이 그런 거액을 잃고 가만히 앉아 되어가는 꼴만 보고 있을 리는 없다.

역시 우리가 믿고 사는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며 감사한 마음으로 귀가를 서둘렀다. 집으로 올라갈 것도 없이 경비실로 향했다. 그러한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자동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불현듯 무언가 순조롭지 않은 일이 생길 런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드는 것이었다. 경비실로 들어간 아내는 쉽게 나오지를 않는다. 불길한 예감은 대개 적중하는 경우가 많다.

한참이 지나서야 경비원 아저씨의 허리숙인 경례를 받으면서 아내가 나온다. 되찾은 지갑을 손에 들고 기쁘지 않은 표정으로 나 있는 자동차 쪽으로 걸어온다. 무언가 심상치가 않다.

“왜 무슨 일이 생긴 거요?” 아내는 일단 집으로 들어가자면서 아무런 말이 없다. 마음속으로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궁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갑갑했지만 나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집으로 올라갔다. 아내는 냉수 한 컵을 벌컥 벌컥 마시고 나더니 그제 서야 입을 뗀다. 지갑 안에 있던 현금 십삼만 구천 원 중에서 천 원짜리 아홉 장만 남고 만 원짜리 열 세장은 없어졌다는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먼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이러한 사건이 발생 할 수 있는 어떤 개연성이다. 맨 처음 주운 이는 501호 할머니다. 그런데 지갑 속은 자세하게 들여다보진 않았지만 돈이 들어있다는 것만 확인하고 그냥 경비실에 맡겼다고 했다. 그렇다면 습득한 장소와 시간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혹 다른 이가 먼저 주웠다가 속에 들어있는 현금만 빼고 다시 길에 던져 버렸을 가능성도 배제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은 그 어떤 이라 해도 지갑 속에 들어있던 현찰 전부가 아닌 만 원짜리 열세장만 빼내었을까 하는 의문점이다. 천 원짜리는 필요하지가 않았다? 그것은 합리적인 추리가 아니다.

 아내는 귤 한 박스를 들고 501호로 내려갔다. 그 동안 나는 커피 한잔을 내려 마시면서 편하게 앉아 11시부터 시작하는 진품명품 텔레비전 프로를 시청하고 있었다. 잃어버린 지갑을 찾는다는 문제에 대하여 나는 그리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갖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전액을 다 찾지 못 한다 하더라도 크게 섭섭할 것도 없는 어설픈 방관자 였다. 한참 뒤에 아내가 올라왔다. 무슨 말이 오고갔는지 기대가 된다. 무슨 소득을 얻어왔을까.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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