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그날, 그 사람 같다.

여름과 가을의 틈을 가르던 한줄기 저녁 바람에 나도 모르게 눈가가 짠했던, 그날 저녁의 오랜 친구들. 그 위대한 만남, 그날을 나는 ‘특별한 시간’이라 불렀다. 홀로 싸워온 수년의 세월을 보내고서 그는 ‘모든 것은 잠시뿐이고마, 정말 잠시뿐이고마, 세월도, 술도, 머리숱도 잠시 뿐이고마’라고 했다.

이 억센 사투리의 봉준이 몸을 타고 흘러나오면 발 들고 선 순간의 고독이 허공에 맺힐 듯, 찰나마다 강렬했다.

남몰래 눈물이 마를 날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슬퍼서 더러운 그것들을 끌어안고 밤을 세우던 해어화(解語花 말을 알아 듣는 꽃)처럼…

전봉준, 평생 가난했던 사람. 나고 자라면서 빈곤이 따라다녔고, 성인이 되고서는 자발적으로 가난한 삶을 택했다.

그는 허름한 작업복과 고무신만 신고 다녔다. 또 방 한칸 딸린 집만으로도 풍족하다고 느꼈다. ‘물질이 풍족하면 마음이 가난할 수 없으니 그것이 두렵다’고…

그것은 그의 인생관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만난 이들은 대부분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슬프기 마련이다. 그는 슬픈 이야기를 통해 희망과 사랑을 말하고자 했다.

찬란한 승리는 삶에서 연민을 도려내고 마는 무자비한 칼날이 숨어있다.

봉준이는 연약함과 남루함, 투박함과 비루함에서 양분을 취해오고 보잘것없는 존재들에게서 순결한 정신을 길어 올렸다. 사칭이나 기만을 통해서 획득될 수 없는 무언가를 소유한 그였다. 그의 정신적 고통은 전날 밤 광대뼈가 불거진, 졸음이 가득한 선량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불현 듯 떠올랐다.

하지만 그때 그 불꽃이 정의를 향해 첫발을 내딛던 많은 사람의 가슴 속에 타올랐던, 그 불꽃이 아직 우리에겐 남아 있다. 권력의 부조리와 그 허무함, 배금·물질주의의 경계, 인간성 상실, 나아가 희망과 꿈까지 이 시대 우리 사회의 여러 모습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담아냈다.

“만약에 정말로 내 살아온 모든 삶이, 내 생각과 행동이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런 것이 아이라면 어찌하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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