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가 이 땅에 새긴 생의 내력을 알고서부터 나는 우리네 산하를 마냥 감탄만 할 수 없었다. 이 산하에 얹히고 저 바다에 밴 우리네 삶은 기구하고 가혹한 것이었다. 봉준이와 함께한 동행이었다.

“어느 섬의 고단한 일상을 지켜보는 일이 었고마, 지리산에 드는 건 빨치산의 역사를 목격하는 일이었제.”
“…”
“강화도 광성보에서는 신미양효가 얼마나 끔찍한 학살이었는지 배웠는기라.”“…”
“안동에서는 가미카제(神風)에 휩쓸려 죽은 몽골군 대부분이 고려인이었다는 걸 알고서 몸서리를 쳤고마.”

“우리네가 배가 고파서 흰 꽃 핀 나무를 밥나무(이팝니무)라 불렀고 새가 울어도 ‘솥다(소쩍새)’는 소리로 들었어.”
“이 땅위의 모든게 서러웠고마.”
“길 위의 나는 내내 아팠어.”

학점은 바닥이었다. 그럭저럭 대학생활을 하면 자동으로 사회로 배출되는 컨베이어벨트에 올라탄 느낌이 싫었다. 당시 누구나 고시로 열풍이었다.

나는 문학의 길로 들어서기로 결심했다.

그 당시 나를 붙들어준 시가 있었다. 어지러운 세상의 나침반 같은 책이었다.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지고 싶어서 한눈팔지 않고 책만 봤다. 전공서적 뿐 아니라 철학, 역사, 신학 등 인문학에 탐닉했다. 그저 폭포처럼 책을 치우는 것만이 위안이 되었다.
 
당시 우리는 폭포처럼 살자는 기개를 품게 했고, 폐부를 찌르는 글들은 폭포 같은 청량감을 주었다.

봉준이와의 여행은 한동안 더 우울했다. 아물지 못한 상처가 이 땅에는 너무 많다. 세상의 모든 장소는 상처로 기억된다.

이제는 시냇물, 강물, 바닷물도 다 아름답지만 그 시절은 폭포만이 나를 감동시키는 물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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