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에서 무릇 치열함의 흔적마저 지워내고 무심한 듯 본질만을 던지는 것. 과시는커녕 일말의 생색도 내지 않은 채. 그 공동체는 데모 얘기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운동권에 선봉이면서도 잔뜩 긴장한 후배들을 형 같은 푸근함으로 격려했다.

자신의 지휘봉을 넘겨받을 차세대 리더에게 그는 때로 유머로, 때로 직설로 지도했다. 하지만 함께했던 그들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그의 손이 떠오르곤 했다.
 
옛 술자리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들로 서로를 놀리며 놀았다. 자연을 예찬하며 술과 음식을 먹고 노래를 불렀다. 그 모습을 보며 참 좋은 음악 같다고 생각했다. 왜 그랬는지 명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그 모든 것을 변호하려고 애썼다. 그러다 갑자기 자신이 변호하려는 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허약한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무엇 하나 제대로 변호할 수가 없었다.

암울한 시기였다. 당시 우리 사회는 성장의 문턱에 있었다. 나는 인생의 목표를 설정해야 하는 대학시절이었다. 지금처럼 풍요로운 시대도 아니었고, 마음 놓고 떠들어댈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다. 혼돈, 방황, 좌절, 불안 등이 젊은 날의 표제어였다. 대학 어느 해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탈 것 없이 무작정 걸었다. 

 “전국의 좋다는 데는 혼자 다 다니면서 왜 그렇게 울분을 토하고 다녀요?”

처음엔 웬 시비인가 했다가 문득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이내 나는 내가 쓴 여행 기사를 학보사에 게재했고, 난데없었던 다혜로 부터의 지적을 잠자코 수긍했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여행은 우울했다. 풍경을 응시하는 시선은 불편했고, 땅을 디디는 걸음은 비틀댔다. 방방고곡 헤집고 다닐수록 나의 여행은 침울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래, 나는 길 위에서 울고 다녔어. 말하자면 아는 만큼 아팠어.”
 “…”
 “삼천리 금수강산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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