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너무 취했고, 나는 엎어졌다. 벽에 ‘소주는 1인당 한 병만 드세요’라고 써 붙인 글자가 눈에 크게 들어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어느새 꼬치 빈 꼬챙이가 자리 앞에 수북이 싸였다.

떠오른 추억하나. 기약 없는 미래에 만나자는 잠재적 약속만 있을 뿐. 관계가 두절된 것은 두렵고, 당장 만나기는 기야말로 부담스러운 여자.

그 짧았던 순간들. 제일 좋은 게 뭐냐고 물어서 꼬치라고 일부러 말해주었던,  서울 깍쟁이. 그런데 그녀는 ‘세상 모든 빛깔을 모조리 녹여낸 듯 까맣고 동그란 눈과, 세상 모든 벌과 나비들이 탐하고 아낄 만큼 불그스름하고 또렷한 입술을 가진, 이제 나는 잠시라도 그녀의 눈동자에서 뗄 수 없다. ’사랑한다‘는 그 절실함으로, 애타는 기다림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견뎌야 한다.

절실한 사랑은 갈수록 한없이 긴장되고 초조하게 한다.

그녀가 결혼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다혜야, 우리 지금 당장 만나자.” 그녀가 신혼여행을 떠나기 일주일 전이었다.

그날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냈다. 그녀와 함께 한 그 어느 때보다 더 소중하고 애틋한 시간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투명한 미래를 기약하는 것이 아닌 현재에 충실 하는 것임을.
 
지금 이 순간만이 유효하다는 것을. 그녀는 잘 살고 있을까? 그녀가 유난히 그리워지는 밤이다. 어쩌다 한 번쯤은 내게 미안해할까. 오늘밤은 다혜가 가을 단풍보다 더 뜨겁게 내 가슴을 물들이고 있다. 세월 속에 묻혀 사랑을 잃어버린 내 심장 속에 절실한 사랑의 맥박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

실은 몇 병을 비우고 자리를 뜰까 생각했었다. 젊을 때와는 달리 신체적인 한계를 느껴서 그럴까. 불상사도 빈발했다. 그들과 흉허물 없이 얘기 주고받는 낙이 아까워서 여태껏 궁둥이를 무겁게 한 것이다.

서로 얼굴을 익힌 단골 취객들과 눈인사를 뒤로 하고 나왔다. 좁은 골목은 도무지 서울 도심이라고 믿기 어려운 풍경이다.

을지로 3, 4가 일대는 1980년대까지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곳 중 하나였다.

극장이 있었고, 제조업 업장에서 일하는 이들을 겨냥한 유흥업소로 밤에도 북적댔다. 하지만 이 일대 제조업이 쇠퇴하고. 재개발까지 미뤄지면서 1980년대 모습이 박제된 채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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