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말은 옳지만 당신이 할 소리가 아니야!”

먼저 자신의 주장이나 이론이 객관적 사실과 일치함을 보여야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기준이 되어야할 사실이란, 모든 이론과 주장으로부터 독립된 순수한 중립적 사실이 아니라, 그것 역시 누군가에 의해 구성되고 해석된 것이다.

30, 40년은 훌쩍 뒷걸음친 것 같다는 기분을 토로하는 자신이라 해서, 그렇게 좋아졌다는 맛을 못 봐서 좋은 줄 모르는 건 아닐 것이다.

우리를 기쁘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는 등속이 넘쳐 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니 세상 살기 좋아졌단 말이 옳은 말이다. 그런데 굳이 세계 최상위권인 노년층의 빈곤율, 비정규직 비율, 자살율을 거론하는 이유는 무슨 심보일까.

 “수많은 지표들이, 한국 사회가 상대적으로 사람 살 곳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기라예.”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초라한 느낌이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달라져도 한참 달라진 것이다. 미묘하고 민감한 순간이었다.

 “다같이 무너지고 있고마!”
 “무너지다뇨?“
 “민족의 뿌리가 어떤 것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후세대가 어떻게 역사를 끌고 갈건가요?”

미묘하고 민감한 순간이 있다. 질문 뒤에 숨겨진 것은 체제순응적인 의도가 있다는 의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회가 피곤한 이유는 서로 다른 가치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틈을 어느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메워버리려 하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말하나. 왜 이토록 심하게 말하나. 왜 꼭 막말인가. 영 마음이 편치 않다. 말들이 우리에게 혹은 우리가 말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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