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경찰서 경무과장 정규각

  세종경찰서 경무과장 정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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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문으로 들었다. 노인이 죽었다는 얘기를…

노인은 혈액투석환자였다. 주 3회 투석을 받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다. 혈액투석은 신장기능이 떨어진 만성신부전환자한테 신장투석기를 이용해 피를 정화시켜 연명해가는 난치병이다. 국가에서는 희귀난치성질환으로 지정하여 의료비를 지원해주고 있다.

노인은 보건소에 등록해 의료비를 지원받아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젊은 날 허랑방탕한 생활로 몸은 쇠잔해지고 급기야는 고혈압, 당뇨병에 신부전까지 와서 투석을 받아야 살아갈 수 있었다. 가족들은 아버지의 무책임한 삶에 질려버려 등을 돌린 지 오래고 노인은 외롭게 혼자 투병하고 있었다.

경찰지구대장으로 근무하던 시절에 보건소에 들렀다가 우연히 직원과 노인이 상담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동안 노인은 치료비를 지원받다가 가족들의 재산증가로 지원을 해줄 수 없다는 얘기인 것 같았다.

지금은 국가적으로 희귀난치성 질환에 대한 많은 지원을 해주지만 그때만 해도 복지예산이 한계가 있었던지라 가족들의 재산이 기준이상일 경우 지원이 불가했었던 모양이다. 노인에게 등을 돌린 가족들의 재산이 증식됐지만 자식들에게는 말도 못하고 의료비 지원불가 통보를 받고 있던 중이었다.

노인은 자신의 패륜적 삶의 결과에 대한 댓가를 받고 있었다. 젊은 날 사업에 투자해 돈을 벌었으나 주색잡기[酒色雜技]에 다 써버리고 가족을 전혀 돌보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들은 피폐한 삶으로 인하여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재능을 썩히며 아버지에게 한을 품었고, 아내 또한 폭력과 외도가 일상화 되고 내연녀에게 물 쓰듯이 돈을 낭비하는 남편을 원수처럼 대했단다.

결국 자식들은 아버지를 떠났고 사업도 실패했다. 빚더미에 안게 돼 날마다 술로 일관하다 건강이 나빠져 혈액투석까지 받게 됐다는 것이다. 병원에서는 그동안 치료비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은 투석을 해줄 수 없다고 한다.

도와주지 않으면 자긴 곧 죽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선처해 달라는 노인의 간곡한 요청에도 규정 때문에 도와줄 수 없는 보건소 직원의 얼굴에는 난감함과 안쓰러움이 뒤섞여 있었다. 그리곤 얼마 뒤 노인이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가족들은 장례식이나 제대로 치러줬을까.

화려했지만 방탕하게 살았던 젊은 날이 갖다준 건 쓸쓸한 노년길… 노인은 죽어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외로움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회한과 참회에 젖었을까? 아님 가족들과 세상을 원망하면서 초라하게 죽어갔을까?
우리는 모두 불확실한 미래 앞에 서 있다. 각자의 인생이 살아온 대로 노년의 삶이 각자의 모습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다. 젊은 날에 짜임새 있게 살고 주변사람과 관계를 잘 맺으면서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지만 인생이 어디 그리 호락호락한가. 때로는 예고치도 않은 사건과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이 삶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경우도 많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요 인류의 업보가 같이 연결되어 연대책임을 묻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모두가 하나로 연결된 지구가족이기 때문에 인류유전의 업보까지 같이 한 몸으로 받아내야 된다는 뜻이다. 내 인생에 내 잘못과는 상관없이 시련과 파도가 덮칠 때 이런 관점으로 보게 되면 한결 맘이 편해진다. 그래서 비로소 사랑이야말로 인류의 가장 중요한 계명[誡命]이란 것을 이해하게 된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오곡백과로 아름답던 가을은 이내 스산한 바람으로 열매를 떨어뜨리고 대지를 황량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백설의 향연이 펼쳐지고 세상은 단꿈을 꾸며 안식의 계절을 맞이하겠지.

황량한 대지는 우리에게 절망도 되지만 안식의 계절을 꿈꾸는 꿈이 되기도 한다. 상실의 아픔은 어쩌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살찌우고 순백의 결정체로 만드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꽃은 피었다 떨어지고 육체는 성장했다 쇠락한다.
내 나이 벌써 오십대 중후반,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면서 어쩔 수 없이 쇠잔해지는 육체와 여려지는 맘을 바라보며 마음이 늘 소란스럽다. 살아온 젊은 날이 어쨌던지 결과로 맞이하는 노년을 어떻게 만들지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달려있다 할 것이다.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인생을 평가하는 기준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가 선택한 인생을 통하여 무엇을 깨닫고 어떻게 열매 맺느냐일 것이다. 비록 그 노인처럼 쓸쓸하고 참담함이 덮쳐 올지라도 그것을 더 깊은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 꽃 피울 수 있는 것이다. 실패를 통하여 배려와 용서를 깊이 터득할 것이다.

가을은 안식을 기다리며 황금들녘을 비워가고 우리는 “사랑”을 알기 위해 노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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