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경찰서 경무과장 정규각

  세종경찰서 경무과장 정규각
  세종경찰서 경무과장 정규각
수년전 전국적으로 구제역이 터져 살처분 할 때의 일이다. 구제역은 소나 돼지 등 발굽이 갈라진 동물에게 발생하는 급성바이러스 전염병으로 전염력이 커서 구제역이 발생하면 농장뿐 아니라 주변지역 유사동물까지 살 처분한다.

때는 오월 보리밭이 춘풍에 일렁이는 꿈과 소망의 봄날,  모군에서는 구제역으로 많은 소들을 살 처분하게 됐고 나는 경찰관으로서 교통통제 지원근무를 하게 됐다.

수의사가 농가 축사를 순회하며 살 처분 주사를 놓으면 소는 근육이 마비되면서 급격히 죽어가고 네 다리를 묶어 덤프차량에 싣고 매몰지로 옮겨와 미리 파둔 구덩이에 매몰했다.

살처분조는 하얀 마스크에 방제복을 입고 눈만 보인 채 작업을 하는데, 소들은 방제복 입은 수의사를 보면 죽음을 예감하고 이리저리 피하다가 마침내 한줄기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는 죽음에 순응하듯 주사를 맞았다.

나는 그렇게 죽어 실려온 소들을 구덩이에 쏟아 붇고 매몰하는 매몰조 인근에서 차량통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초저녁부터 시작된 매몰작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 마지막으로 실려온 소들이 덤프트럭에서 구덩이로 쏟아 부어지고 작업인부들은 포크레인으로 흙을 퍼 구덩이를 매몰하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 한 마리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다. 때때로 주사가 잘못 접종될 경우 이런 현상이 생긴다 한다. 소는 동료들이 죽어 나자빠진 구덩이 속에서 고개를 들고 어리둥절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우리를 바라봤다. 한참 자라나는 어린 소였다. 사람으로 치면 청소년기 정도의 시기에 구제역의 한파를 피하지 못하고 떠밀려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넓고 크게 파진 구덩이는 침출수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바닥에 비닐을 깔았는데 간밤에 비가와서 물이 많이 고여 있었고 엄마소들이 죽어 널브러져 있는 구덩이 가운데에서 차가운 물에 잠긴 채 등과 목을 내 놓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소의 성정은 여리고 순하여 주인과 교감하는 영물이다. 농부들은 소를 키우는 동안 오고가는 교감에 정이 들어 소를 내다 팔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한다.

소의 눈은  맑고 순수해 그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의 고르지 못한 오욕칠정(五慾七情)의 심상이 드러나 얼굴이 붉어지고 부끄러워진다. 그래서 소는 영물로서 인정받고 불가에서는 도를 터득해 가는 십우도(十牛圖) 과정중의 하나로 소를 등장시키고 있다. 특히 우리 한우들은 농가에서 서너 마리 정도 소규모적으로 키우는 터라 그 과정에서 농부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 정이 듬뿍 들고, 오고가는 눈빛교환으로 농부의 가슴에는 가족과 같은 존재로 자리하는 것이다.

그렇게 농부와 엄마소한테서 사랑 받고 자란 소년 같은 소가 알지도 못하는 죽음 앞에 갑자기 내던져져 홀로 남은 채 영문도 모르고 어리둥절해 있는 것이다. 

소의 커다란 눈망울에는 살려달라는 소리 없는 애원과 공포와 슬픔이 가득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무심한  눈빛 속에는 생멸하는 모든 존재의 고통과 슬픔과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 같아 나는 소의 눈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래서 살처분자들은 절대 소와 눈이 마주쳐서는 안 된다고 하고 도살장에서도 인부들이 소의 눈을 바라보지 않는다 한다.

포크레인의 흙이 점점 주변 소들을 덮어가기 시작한다. 어린 소는 여전히 나의 눈을 바라보고 있다. 점점 조여 오는 죽음의 늪 앞에서 간절히 애원하는 눈빛으로 울부짖음도 없이 커다란 눈망울엔 슬픔이 가득한 채 그렇게…

 어린 소는 그렇게 죽어갔다.
 
그 눈빛은 나의 가슴에 타는 듯이 찍혔고 육두문자(肉頭文字)처럼 각인됐다.

나는 끝까지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포크레인이 흙을 덮는 가운데 결국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영문도 알 수 없이 죽음의 공포 앞에 내던져져 죽어 가는 눈빛의 절규와 하소연을 더 이상은 감당할 수 없었다.

말 못하는 짐승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과 그 절박한 순간에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내 자신의 무력감과, 이세상의 구조적 사슬에서 피해갈 수 없는 만물의 생멸의 순간, 오로지 인간만을 위해 이러한 장면을 연출해 낸 분노와 수치와 죄의식이 뒤범벅되어 있었다. 살려달라는 사형수 앞에서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신부들의 고뇌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사형수는 죄나 지었으니까 그렇다 치지만 아무 죄없는 이 어린 소는 어찌 할거냐는 말이다.

소의 눈빛은 오랫동안 가슴에 살아있어 나를 괴롭게 했다. 마치 베일로 가려진 막 뒤에서 내 일거수일투족과 고르지 못한 내 심상의 움직임을 지적하고 감시하는 심판관 같았다.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던 무력감과 우리자신에 대한 분노와 수치들이 죄의식으로 변하여 절규하며 가슴을 헤집고 다녔다. 어린 소가 죽어가며 그 무언의 절규 속에서 타는 눈빛으로 내게 말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러던 어느 날, 늘 등뒤에서 지켜보던 소의 눈빛이, 구해달라는 울부짖음과 두려움과 슬픔으로 가득 찼던 소의 눈빛이 갑자기 자비와 용서의 눈빛으로 내 가슴에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두려움과 죄의식의 문이 열리면서 그 너머에 있는 평안함과 따뜻함으로 나를 감싸안기 시작했다. 내 가슴은 밀물처럼 다가오는 그 자비의 물결 속에 젖으면서 형언할 수 없는 위로와 평안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그 순간 소의 눈빛은 모든 것을 품어주고 용서해주는 신의 눈빛이었다. 소가 아니라, 말 못하는 미물의 짐승이 아니라 신이 만물을 통하여 역사하고 모든 생명이 하나로 통한다는 것을 너무도 확실하고 선명하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이 있다. 영장이라는 말이 생명 즉 영(靈)을 가지고 있는 동식물의 맨 위 단계의 위치라 할 수 있을지언정 사물을 마음대로 만들고 학대하고 생명을 거두는 능력과 무소불위의 권한을 갖는다는 뜻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린 소는 내게 미물인 자신을 통하여 신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들어라 말하고 있었다.

신성(神聖)은 만물을 통하여 표현되고 열린 눈과 귀를 가지고 있으면 만물 속에 깃든 신성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몸서리쳐지는 공포도, 죽음으로 향해 가는 몸짓도 ‘사랑’ 이라는 신의 존재를 명징(明徵)하게 알려주는 사건일 뿐이었다.

죽음을 선택해 살신성인하며 내게 하나 됨의 세계를 가르쳐준 어린 소의 명복을 빈다. 그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스스로 소의 몸을 선택해 왔고 자신의 할 일을 다하고 그가 신의 품으로 돌아가 안식하고 있음을 느낀다.

오늘도 나는 산책길에 축사에 있는 소들과 눈을 마주치곤 한다.

소의 눈빛은 무심하다. 무심한 그 눈빛 속에는 나와 같은 성정의 움직임과 자비와 연민의 꿈틀거림을 본다. 나와 하나된 생명으로서의 교감이 오고가고 있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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