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한 우리는 전 세계의 힘을 얻어 다시 영원히 대한민국 정부를 건드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수백만의 힘 있는 피로 무장한 우리의 주권을 꿈엔들 다시 빼앗길 수 있겠는가. 비록 아직 우리 국토를 찾지 못하고 아직 여러 나라의 승인을 얻지 못했어도 또한 우리 임시정부를 서울에 세우지 못하고 외국의 영토에 세웠어도 우리 희망과 정신에 중심적이요”라고 조동호 애국지사는 독립신문에 1919년 글을 썼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충청도 대표이자 초대 국무위원이였던 조동호 애국지사는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해 남경 금릉대학에 입학한다. 졸업 후 구국일보와 중화신보의 기자가 됐고 독립단체에 참가해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한다.

그러다 부민관 폭파사건으로 체포돼 투옥되고 해방된 다음날인 8월 16일 출옥하나 일제의 고문후유증으로 투병 중 1954년 9월 서거한다. 정부에서는 조동호 애국지사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된다.

자유와 독립을 향한 민족의 깨우침을 설파하는 언론인으로서, 조국광복이라는 대의를 위해 일제에 맞서 싸웠던 피 끓는 독립투사로서, 온 몸을 다 바쳤던 조동호 애국지사! 우리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국가와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자신보다 가족보다 국가를 선택했던 애국시자 분들이 국립대전현충원에 잠들어 계신다.

애국지사묘역에 잠들어 계시는 유성우 애국지사는 1919년 경북 일원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해 7월까지 독립운동을 하던 중 일경의 추격을 받자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한다. 경북대의원으로 활약했던 유성우 애국지사는 군자금 조달지령을 받고 국내로 잠입했는데 1920년 이병한, 유시언과 함께 권총을 소지하고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피체돼 징역 5년형을 받는다. 형이 확정돼 옥고를 치르던 중 단식투쟁을 벌이다가 안타깝게 옥중에서 순국한다.

1977년 건국포장과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된다.

이우민 애국지사는 충북 괴산군 오천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일경에 피체된다.

1920년 5월 상해 임시정부에 참가해 선전부원으로 활동했고 1922년 천진과 북경일대에서 독립운동가를 양성하는 육영학교 설립을 추진한다.

1926년 나석주 의사가 투탄의거를 위해 국내에 잠입할 때 동지 박세훈 등과 함께 거사해 자금과 권총, 폭탄 등을 지원한다. 1930년 일경에 피체돼 옥고를 치르고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된다.

또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교통충장 임시의정원 경기도 의원과 의원자격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신간회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신석우 애국지사, 광복회를 조직하고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였으며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상임위원으로 활동했던 손일민 애국지사, 임시정부의 파견원으로 김규식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던 김규홍 애국지사 등이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잠들어 계신다.

지난 13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94주년이 되는 뜻 깊은 날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외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됐으며 대한민국정부의 모태가 됐다. 국립대전현충원에는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약했던 분들을 포함해 애국지사 3000 여위가 안장돼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독립을 위해 활약했던 수많은 애국지사 분들이 계셨기에 지금의 대한민국과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분들의 숭고한 희생이 한반도 평화의 꽃으로 피어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건한 대한민국을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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