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학생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많은 학생들이 어머니라고 적었다. 전혀 뜻밖이라거나 예상치 못한 것도 아니지만 대다수의 학생들이 그렇게 응답한 데는 좀 의외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리 대답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 이유라는 것을 두 가지 정도로 생각해볼 수 있겠는데 달갑지 않은 내용도 포함돼 있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다. 하나는 정말 어머니를 존경해서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연민과 감사의 대상이자, 가히 없는 사랑의 희생자셨으니 말이다. 좋은 음식이 있어도, 맘에 드는 물건이 있어도,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늘 괜찮다는 말로 당신은 물리셨으니까. 하지만 다른 하나는 모든 일을 어머니가 결정하고 리드하고 주관하면서 생긴 가정구조의 변화로 인해서다. 현재 핵가족에서 어머니는 더 이상 희생적 존재로서만 기억되지 않는다. 어머니는 한 때 베개 밑 송사를 최종 결정하던 아버지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아니 아예 베개 밑 송사라는 말조차 사라져 버리고 있다.

뿐만 이랴. 가부장제의 억압으로 괴로워하고 신음하던 가련한 여인이지도 않다. 핵가족으로 인해 맞벌이로 나설 수밖에 없고, 결손가정을 책임지다 보니 적극적으로 경제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노래방 같은 데서 웃음을 팔며 아이의 학원비를 준비하는 어머니도 여러 번 보도된 바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언제부턴지 여성의 권위가 어머니를 대신해 가정구조의 상부를 지배하면서 아이들이 어머니를 두려워하고 맹목적으로 의지만하는 경향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번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어머니를 어머니답게 하는 존개감에 대한 세상의 눈이다. 모성애가 모성애로서의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풍토가 지배하는 세상이 벌써부터 와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어머니들의 희생적 사랑을 “모성애는 인간의 감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다른 모든 감정처럼 모성애도 불확실하고, 일시적이고, 완전하지 않다”고 말한 바댕테르의 말에 기댈 수는 없지 않은가.

여섯 자녀 모두 하버드대와 예일대를 졸업시키고, 세계적 명사로 자리 잡게 한, ‘섬기는 부모가 자녀를 큰 사람으로 키운다’의 저자 전혜성 박사는 아이를 키우는데 절대적 조건으로 “덕이 재주를 앞서야 한다”고 말한다.

재주만 있고 덕이 없는 아이가 자신을 섬기고, 부모를 섬기며, 다른 사람을 섬길 리 만무하다. 요즘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난사람들(고위인사들)의 작태는 한갓 재주만 믿고 채 덕을 채우지 못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어머니들은 어떤가.

각종 학원이다 무슨 대회다 해서 어릴 때부터 스펙 쌓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지 정작 덕을 가르치는 데는 여간 소홀한 게 아니다. 아예 효 따위를 기대하지 않는다면 몰라도 재주만을 키우며 남처럼 길러서는 안 될 것이다.

효는 결코 스펙 쌓기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지금의 풍토라면 인성교육 운운하며 효도 스펙의 일환으로 전략할 소지가 아주 없지는 않다. 과제로 자기가 집에서 한 효도에 대해 조사해오라고 하면 부모의 조작에 의해 얼마든지 꾸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어머니가 가정구조를 주도하며 긍정적인 면도 꽤 없지 않았다. 저 밖에 모르는 사내아이에게 여성의 소중함에서 집안일을 공동으로 부담하는 것까지 실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또 다른 가모장제의 전형이 돼서는 안 돼야 한다. 그렇게 경멸했던 가부장제의 모순과 폐단을 다시 뒤밟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아이들이 어머니를 두려워하고 의지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진실로 존경하고 따르는 사랑의 어머니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그럴 때 효는 저절로 우리 곁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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