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번째 이야기-

<삼천굴 ①> 운주산에는 삼천굴이 있다. 산아래 주차장에서 계곡으로 나 있는 등산로를 따라보면 중간에 삼천굴이란 안내 표지판이 있다. 그런데 그곳에는 굴이 없다. 바위 사이로 졸졸졸 흐르는 계곡과 커다란 바위가 으슥하게 있을 뿐이다. 굴이 없는데 왜 삼천굴이란 표지를 세웠을까? 아마도 운주산에서 삼천굴이 전설에 지나지 않지만, 삼천굴의 존재는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삼천굴과 연관된 피숫골에 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전동면 미곡리 피숫골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우리나라 전국토가 일본의 약탈과 살상으로 고향을 떠나는 이, 깊은 산속으로 피난을 가는 이가 많았다. 충청도 새재의 싸움에서 신립장군이 전사하면서 의기양양해진 왜적들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살상과 약탈을 마구 일삼았다. 처음에는 섬나라 놈들이라고 깔보았지만, 조총을 앞세우고 밀어닥치는 그들을 막아낼 힘이 우리에게는 없었다. 그리고 왜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나라 곳곳을 염탐하기 위해 중(스님)을 이용했다. 조선 땅에 몰래 숨어든 중(스님)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설법하거나 절을 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침략을 위한 지형이나 중요인물을 일일이 기록하여 전쟁 당시 왜구 앞에는 중이 꼭 앞장서서 안내를 한다든지 심지어는 지휘하는 때도 있었다. 조선 사람들은 스님하면 전혀 의심을 하지 않고 스님이 그런 엄청난 것을 조사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큰 피해를 입었고, 우리 지역은 옛날부터 피난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지금의 미곡리 일대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전의·전동 지역은 물론 멀리 목천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박도령이라 불리는 소년도 끼어 있었다. 박도령은 열 살로 목천에서 부모님과 함께 이곳 미곡리에 피난을 왔다. 미곡리는 주위에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쳤기 때문에 이곳만은 왜구들이 모를 것이라는 것이 피난민들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피난민의 이러한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어떻게 알았는지 피난민을 에워싼 것은 왜구들이었고 피난민은 당황하여 다른 곳으로 피하려 하였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왜구에게 들키게 된 것은 미리 이곳을 염탐한 일본 중(스님)에 의해 조심스레 접근하여 피난길을 에워싼 것이다. 왜구들은 단 한 사람도 살려두지 말라고 소리치면서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렀다. 주위에는 순식간에 붉은 피가 주위를 흥건히 적셔 내를 이루는 듯, 참혹한 광경이 벌어졌다. 박도령 또한 아버지가 손을 꼭 쥐고 이리저리 왜구를 피했으나 끈질기게 따라붙는 왜구에 의해 아버지는 칼에 찔려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을 바라보던 어머니는 아버지를 부르면서 울부짖자 아버지를 살해했던 왜구가 이번에는 어머니를 향해 칼을 휘둘러 붉은 피가 흰옷을 물들였다. 어머니가 쓰러지면서 옆에 사람이 쓰러지고 시체는 겹겹이 쌓였다. 박도령은 아버지가 죽으면서 손을 꼭 잡았고 어머니가 쓰러지면서 앞을 가려 왜구의 시퍼런 칼날을 피할 수 있었다. 마구 뛰어다니며 칼날을 휘두르던 왜구들 사이에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하는 중이 눈에 띄었다. 박도령은 그 중의 얼굴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죽은 사람을 위해 염불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박도령에게는 너무 미운 짓이었고, 언젠가는 원수를 갚으리라 다짐하였다. 박도령은 부모가 무참히 죽었지만 소리내어 울지 않고 오직 훗날 원수를 갚겠다고 다짐했다. 서산에 해가 질 무렵 왜구들은 더 이상 생존자가 없음을 확인하고 그곳을 떠나 청주쪽으로 떠났다. 박도령은 주위가 어두운 것을 틈타 산으로 산으로 도망하여 고향인 목천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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