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를 보는 시선들이 곱지 않다. 도무지 떳떳하고 올바른 것이 별로 없다는 얘기다. 특히, 노년층의 젊은 세대에 대한 걱정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싹 수 없고 무례한데다 버르장머리까지 없다는 것이다. 전혀 틀린 얘기는 아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을 보면 도대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있기나 한 건지 걱정스러우니 말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자. 우리 사회에서 언제부턴가 어른이 사라졌다. 나이 든 사람은 많은데, 어른이라고 할 만한 이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어른은 당연히 말과 행실이 바르고 점잖으며 덕이 있는, 공경하고 본받을 만한 사람을 말함이다.

그런데 어른이 어른 구실을 못하니 버릇없고 무례하고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이 그 틈바구니를 메울 수밖에. 그러니 어른을 존경해야 할 일도 사라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젊은 세대들이 저렇게 된 데에는 다 까닭이 있다는 얘기다.

더군다나 부모 된 자가 제 어버이 섬기는 것에 성심을 다하지 않는데, 어찌 그 자식이 정성을 쏟겠는가. 어른이 떠난 자리에 절대 효가 존재할 수 없는 이유다. 본받고 따르지를 못했는데 어떻게 효가 자생할 틈이 생기겠는가 말이다.‘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다’라느니 ‘청소년은 그 사회의 얼굴이다’라느니 하는, 어떻게 보면 진부하기까지 한 말들을 굳이 쏟아내지 않더라도 젊은 세대들이 배우고 본받을 터전을 마련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강태공은 “내가 어버이에게 효도 하면 내 자식이 또한 나에게 효도하기 마련이니, 자신이 어버이에게 효도를 하지 않았는데 자식이 어찌 나에게 효도 하겠는가?”라고 일깨웠다.

또, 명심보감은 “효도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효도하고 순종하는 자식을 낳을 것이고, 오역하는 사람은 오역하는 자식을 낳을 것”이라고 타일렀는지도 모른다. 

두 아버지가 있었다. 두 아버지 다 교직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한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철저하고 고집스러울 정도로 바르고 청렴한 생활을 보여줬다. 한 번도 효도를 하라느니 올바르게 살라느니 하는 말 따위를 하지 않았다.

반면 또 한 아버지는 한 번도 바르거나 청렴한 생활을 보여주지 못했다. 온갖 지저분하고 추잡한 일도 돈이 되면 뭐든지 했다.

이 두 아버지의 자식들은 어떻게 성장했을까. 누가 봐도 뻔한 일이다. 앞서 말한 아버지의 자식들은 모두 바르고 정직하게 성장했다.
그들 역시 모두 교직에 종사하면서 그 자식들에게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뒤의 아버지는 자식들도 모두 부정한 짓을 해댔다. 사업을 하거나 회사에 취직을 했지만 여전히 탐욕스럽고 게걸스럽게 돈들을 모았다. 그러나 아버지를 진정 존경하고 모시고자 하는 자식들은 하나도 없었다. 큰 자식은 사업이 망해서 해외로 도피했는데도 호화롭게 살면서 아버지에게 계속해서 돈을 요구했다. 아버지는 그 자식을 위해서 쉴 새 없이 부정하게 돈을 벌어야 했다.

효는 공경과 사랑 속에서 싹튼다. 자식을 사랑하는 방법이야 다 다르겠지만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것은 공경과 사랑이 먼저여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효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내리사랑 올리사랑’이란 말들을 많이 한다. 참으로 좋고 옳은 말이다. 하지만 ‘내리사랑과 올리사랑’이 제대로 궁합을 이루고 짝이 되려면 부모는 자식을 무턱대고 사랑만 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본이 될 만한 모습을 보여 줘야 하고, 자식은 그 부모를 무조건 부양만 할 것이 아니라 공경하는 마음을 필히 앞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값지고 소중한 전통문화들을 너무 많이 잃어가고 있다. 프러시아식 공교육의 도입이 빚어낸 결과이다. 서당식 교육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서양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못된 관행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울 때가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효 또한 그 전례를 따르지 않을지 자못 염려스러움을 놓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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