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김재찬

절에서 맞는 아침은 특별하다. 의식이 깨기 전에 몸이 먼저 눈을 뜬다. 시작은 바람이었다. 공기는 차분하고 맑았다. 문풍지 밖, 창으로 떨어지는 눈을 바라보며 스님의 말을 듣고 있자면 때때로 법문은 알 수 없는 빗소리로 바뀌기도 한다. 다분히 철학적인 한편으로는 대단히 현실적인 주제로 요약할 수 있다. 생각만 버리면 법우의 법문은 법당 밖에서 소나기가 퍼 붓 듯한 소리나 마찬가지이기도 하다.
금산사 광전에는 수백의 불교신도들과 수행자들이 모여 있었다. 법우 스님이 주재하는 일요 참선법회가 열리는 날이다. 이날 법회 주제는 금강경이었다. 법우의 설법은 간결하고 명확했다. 다분히 추상적인 주제로 변하기 쉬운 선불교. 더구나 언어도단의 극치라는 금강경 해설임에도 법우의 법문은 쉽고 구체적이었다.
“이제 천지간에 꽃으로 가득할겁니다. 봄이니까 꽃이 피는 게 아니라, 꽃이 피어나니 비로소 봄입니다. 세상사도 그와 같아서 꽃피우며 사는 집안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어두운 집도 있습니다. 내가 피운 꽃은 무엇인지를 한번 돌아보십시오.”
법우 스님이 법회를 통해 화목한 가정을 화두로 내놓았다. 이날 법문은 집안에서의 마음공부로 모아졌다.
“내 집 마련에 평생을 전전긍긍했지만, 막상 따뜻한 가족을 만들기에는 소홀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본위로 살기 때문인데,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삶과 가정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웅장한 법당 안에서의 표정은 모두가 진리를 깨우치기라도 하듯 한 노승의 ‘쩌렁쩌렁’ 울리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잠시, 정적을 깨며 일화 한 토막을 꺼냈다.
“한 주부로부터 이기적인 남편 때문에 이혼을 생각 중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라 충고 한마디를 던졌어요. 우선 남편과 식사할 때나 반찬을 준비할 때 부처님이나 천주님, 예수님께 공양 올리는 마음으로 하라는 주문이었지요. 그리고 출근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부처님의 뒷모습으로 생각하라고 타일렀어요.”
그는 잠시 한손의 굵직한 염주 알을 몇 번 주무르더니 말을 이었다.
“나중에 만난 그 주부에게서 처음에는 제 말을 믿지 않았는데, 막상 실행하고 보니 마음이 서서히 풀려가더라는 얘길 들었습니다. 내 마음이 천당과 지옥을 만듭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마음공부란 자아실현이고, 가정회복이기도 합니다.”그 말 속의 의미가 폭풍우처럼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왜일까. 정치인, 경영인, 유명인 등등. 허망한 포장의 범람 속에서 실망하고, 상처받았던 마음이 오아시스를 만난 듯 반짝였다. 긴 시간 계속된 법문을 끝내고서야 비로소 스님은 나와 자리를 같이 했다. 이곳 산사에 머문 지 사흘째 되어서야 법우스님은 단 둘만의 자리를 같이 할 정도로 바쁜 몸이었다.

소나무와 단풍나무가 가지마다 눈을 가득이고 있다. 낙엽수 거목들은 분재 같은 수형을 자랑하며 알몸으로 어우러졌다. 밑동이 한 아름도 넘는 전나무, 잣나무, 소나무들은 푸르름으로 눈이 얼마나 하얀지 일깨워줬다. 쌓인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지가 ‘우두둑’ 꺾이기도 했다. 마침, 스님은 대웅전 앞에 눈이 수북이 쌓인 채 힘겹게 지탱하고 있는 노송을 가리키며 먼저 말문을 열었다.
“잘 생긴 소나무에겐 풍류를 즐기는 도인과 같은 기품이 있지. 소나무를 사랑하는 것은 자연과 한 몸이 되는 우리 전통의 풍류도를 되살리는 일인데…”
그야말로 도인 풍모를 한 그는 소나무를 영적인 존재로 존중하면서 육친처럼 친 겹게 여겼다.
“세계 각국에 소나무가 있지만, 솔잎들이 낏낏하게 일어서는 소나무다운 건 한국, 중국, 일본 이 세 나라에 만 있지. 그 중에서도 한국이 으뜸이야. 우리나라의 자랑인 금강 송을 지키고 가꾸기 위해서는 꼭 소나무를 나라나무로 지정해야 하는데…”

스님은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못하는 것이 인간사이기라도 하듯 입을 ‘쩍’ 한번 다시더니 눈을 질끈 감고 한손에 차를 정중히 올려 한 모금 들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인간의 번뇌, 그리고 삶의 정취를 느끼게 해주는 차는 생활 그 자체인 게야. 나는 차를 수양의 한 방편으로 여겨왔지. 불교는 차 문화에 세워진 하나의 종교라 할 수 있는 게야. 차 한 잔에도 예를 갖추고 세심한 정성을 기울여야지.”
스님은 더 이상의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나는 이때다 싶어 얼른 자세를 바로잡고 한마디 올렸다.
“저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한 제가 머무는 곳에는 토끼도 없고, 여우도 없습니다. 늦게 돌아왔다고 화낼 여자도 없고, 술 마시고 돌아왔다고 우는 여자도 없습니다. 그러나 요즘, 제가 어디로 돌아가야 한다는 슬픔을 느끼곤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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