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효교육원장 부근 최기복

지금 한국 사회는 심한 불감증을 앓고 있다. 이 사회가 온통 부정과 부도덕과 부조리가 만연되어 가고 있는데도 그것을 절감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오죽하면 국민의 88%가 법을 지키면 바보라고 했을까.

그렇다 보니 노년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 퍽퍽하다. 법과 늙는다는 것이 무슨 연관이 있으랴 할지 모르지만, 좀 더 다가가면 결코 먼 얘기일 수 없다. 법이 바로 서지 않으면 노인공경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게 되고 그렇게 되면 효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늙을수록 편안한 마음이 들어야 살기 좋은 사회다. 그래서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노인공경을 등한시 하지 않았다.

조선 태조 3년에 설치된 기로소(耆老所)나 그 이듬해에 설치된 진제소(賑濟所) 등은 그에 대한 구체적인 예이며, 세종실록에 “예전 제왕들은 친히 연락(宴樂, 궁중잔치)에 나아가 존경하는 뜻을 보이고, 혹은 아들이나 손자에게 부역을 면제해 공양하는 일을 이루게 했다”는 기록 역시 그러한 시책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특히, 세종대왕이 1431년에 편찬한 ‘삼강행실도’는 효사상이 왜 절실한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새해가 밝았으니 이제 노년층은 더 늘어날 것이다. 20, 30대보다 50, 60대 인구가 더 많다는 사실에서도 실감난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늙어가고 있다는 암담한 보다도 그들이 가져야 할 의식의 전환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청년실업은 날로 증가하고, 희망을 상실한 젊음이 스스로를 죽이는 경우가 세계 1위인 나라에서 지속적으로 느는 것이 세대 간 극단화 내지는 양극화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이 사회는 치유불가능 한 상태에 이를지도 모른다.

그래서 효를 실천,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노인들이 깨어나야 한다. 효가 소통의 철학이자 나눔의 미학이며, 행위의 시자 우리의 미래고, 갈등해소의 지름길로 인식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른이 어른다워야 가능한 일이다.

효가 초종교적 천륜임을 자라나는 젊음에게 일깨워줘야 할 세대는 기성세대여야 한다. 본보기도 없고 가르치지도 않으면서, 기대기만 한다면 누가 그것을 행하겠는가.

“집안에 노인이 없거든 빌려라”라는 그리스 격언은 우리 현 삶을 조심스럽게 되돌아보게 한다. 삶의 경륜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보여주는 말이기 때문이다.

늙음이 기억력을 빼앗아 갈 지는 모르지만 그 자리에 통찰력을 놓고 간다는 진리 또한 무시해서는 안 될 조언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변함없는 가르침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노인들이 먼저 의식전환에 앞장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회에서 효는 그야말로 옛날이야기가 될 지도 모른다.

‘노년에 혼자 사는 지혜’ 중에서 몇 가지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려는 것도 그러한 의도에서다. 하나는 나의 괴로움이 제일 크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둘은 편한 것 찾지 말고 외로움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셋은 일하고 공치사 하지 말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넷은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며, 청하지 않으면 충고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섯은 의사를 정확히 표현하고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섯은 어떤 상황에서도 남을 헐뜯지 말라는 것이다.

일곱은 같이 사는 며느리나 딸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함께 살지 않는 며느리나 딸이 더 좋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덟은 후덕한 늙은이가 되라는 것이다. 아홉은 몸을 단정히 하고 샤워를 자주 하라는 것이다. 열은 늙음을 자연스럽게 맞이해 인간답게 죽는 모습을 자손들에게 보여주라는 것이다. 

물론 늙기도 서러운데 이런 것들을 어떻게 지키며 살라는 것이냐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젊은이들에게서 본보기가 되지 않는 한 그들 스스로 존경할 리 없다는 평범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효는 본보기에서 제일 먼저 깨닫는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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