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재찬

사람들이 태어나서 살아가고, 그곳 역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
발길 닿은 곳, 선명한 제 색(色)으로 빛나는 도시. 하늘과 땅, 바다와 바람, 누릴 수 있는 모든 자연이 조화롭게 충만했다. 공기에는 박력이 있었고, 사람들에겐 여유가 느껴졌다. 이만한 도시가 또 있을까. 속도에서 쫓기는 일상에서 잠깐의 탈출을 꿈꾸며 잠시 눈을 크게 뜨고 하늘, 바다, 바람을 맞으며 군산 톨게이트에 당도했다.
시작은 바람이었다. 아무렴 어떠랴. 가죽점퍼를 올려 입고, 다시 김제 행 버스 뒷자리에 앉았다. 달린다. 시골 버스라 해도 속도가 높아질수록 쾌감은 증가한다. 창문을 열자 한꺼번에 매서운 공기가 물밀듯 밀려들어왔다. 숨을 쉰다. 날것의 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아, 이런 바람.
눈보라로 신천지를 펼쳐 보일 모악산 자락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미지의 대륙을 향해 항해를 시작한 콜럼버스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버스를 타고 달리는 내내, 내 눈은 잠시도 쉬질 못했다. 과연 오길 잘했구나,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김제로 향한 바다는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넓게 펼쳐진 들판과 생명이 깃든 은빛 결 바다. 하얀 파도는 충분히 아름다웠으니까.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보인다는 김제평야를 가로질러 버스는 평화로이 내달렸다.
일제는 이미 1903년부터 호남평야의 중심, 김제 만경평야에서 침탈을 시작했고, 이곳의 착취는 해방될 때까지 가장 극심했다. 김제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에 살아남기 위하여 하와이, 만주, 북간도, 서간도 연해주, 아시아 및 중앙아시아로 흩어져 나가야했다.
가슴이 ‘탁’트이는 것 같은 후련함마저 느껴지는 대평원. 그 설원(雪原) 위로는 햇살이 가득했다. 나무가 만들어준 길을 따라 빙판의 험난한 길을 차는 힘겹게 헤쳐 나갔다. 완만한 산비탈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층계 논배미가 손바닥만 했고 가파른 비탈에는 제법 큰 밭뙈기들이 펼쳐졌다. 산자락엔 유난히 수피가 붉고 늘씬한 적송 군락이 햇살을 받아 자태가 눈부셨다.
겨울외투를 ‘훌훌’ 벗어버릴 듯. 모악산은 한 폭의 수채화로 펼쳐졌다. 육척거구의 웅대한 산이 장중하니 딱 버티고 서 있다. 저리 아름답고, 저리 담담할 수 있을까.
고은 시인은 모악산을 오르며 이런 말을 했다.
“아! 미치겠구나! 이런 절경을 보고도 실성하지 않는 놈이 있으면 그 놈이 실성한 놈이다!”
이 말을 가슴에 간직하고 있었던 나였기에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때마침 봄을 서둘러 준비하지 않는 모악산은 흰 솜털을 흠씬 뒤집어쓰고 있었다. 하얀 눈이 각도에 따라 다른 빛을 발해 만색의 근원인 흰색의 참 순수함으로 다가왔다.

모악산이 따사로운 어머니의 품처럼 보듬어 준다. 
“그동안 잘 살아왔어. 조금만 더 힘을 내렴.”
예부터 엄뫼, 큰 뫼로 불려져온 모악산은 정상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쇤길바위가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라 하여 모악산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모악산의 줄기는 세 개의 행정구역, 전주시, 김제시, 완주군을 나누며 배재, 장군재, 밤티재의 부드러운 능선이 있고, 금산사 방면의 내모악과 동쪽의 구이 방향의 외모악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산세는 기운찬 호남정맥의 힘을 그대로 이어 우뚝 솟구쳐서 서해에 닿을 것처럼 길게 뻗어 내리다가 산자락 아래 사방 백리가 넘는 호남평야를 펼쳐 놓았고 북쪽으로 천년고도 전주를 품에 안고 있다.
봄꽃 보다도 고운 설화(雪花)가 산천을 물들였다. 모악산이 만들어 놓은 신비경에 빠져들고야 말았다. 왼쪽은 골짜기 상류고 한편으로 큰 냇물이 정겹게 흘렀다. 얼지 않고 흐르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소낙비 떨어지는 소리로 착각할 만큼 귓전을 맴돌았다.
기이한 회백색 바위산을 바라보니 호연지기가 생긴다. 갑자기 구름이 걷히고 수면과 산세가 온전한 제 모습을 드러낸다. 운무(雲霧)의 커튼 사이로 천지의 물결과 산악 봉우리가 모습을 드러내 신비와 장엄함이 극치를 이루었다. 기기묘묘한 형태의 고목이 운해(雲海)가 빚어내는 경치가 넋을 빼놓았다. 바위에 뿌리를 박고 서 있는 기송(奇松)이 잊기 힘든 감동을 준다. 암벽이 솟아있는 사이사이로 패어 들어간 협곡과 금산사 일대의 풍경들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스승님.”
이렇게 불러보면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오는 울림이 있다.
황폐한 내 가슴을 드러내고 스님께 눈물을 왈칵 쏟아내고 싶어서였다. 삶은 이렇게 사는 것이라고 일러주시는 것 같았다. 내가 가야할 길을 스스로 일러주신 스님이셨기에 나는 이 먼 길을 마다않고, 눈길을 헤치며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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