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효교육원장 부근 최기복

1인 가족이 늘고 있다. 네 가구 중 한 곳이 ‘나홀로 가구’란다. 대가족제도의 병폐를 들어 산아제한을 부추겼고 그로 인해 핵가족이 홑가족이 되고 만 것이다. 이제 안 되겠다 싶어 아이 낳기를 장려해보지만 이미 떠난 마음을 돌리기에는 너무나 멀리 왔다.

그러다 보니 강남구청에서는 아이를 8명 낳으면 1억을 지급한다는 어처구니없는 공약을 내세우기도 했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강남구에서 말이다.

아이를 낳고 안 낳고도 엄청 심각한 얘기지만 효를 이야기할 때면 더욱 무거울 수밖에 없다. 효란 본래 본받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인데 본받을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본받은 증자는 부자가 중국 이십사효(二十四孝)에 들어있다. “본 흉내는 내도 안 본 흉내는 못 낸다”말이 이렇게 절실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래서 그런지 송쌍례 할머니의 살신이 눈물겹다. 송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 때 14살의 어린 나이로 22살의 남자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어려서 양친을 여의고 혼자 외롭게 자란 남편은 아내를 극진히 사랑했고 마을에서도 소문날 정도로 금슬이 좋았다. 결혼 4년 만에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는 더 이상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행복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갑자기 남편이 강제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송 할머니는 온갖 고생을 이겨내며 주변의 재혼 권유에도 꿋꿋이 아들과 살고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는 정성을 알았는지 남편은 7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고 다시 행복이 찾아오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일본의 탄광으로 끌려가 고된 노역으로 지칠 데로 지친 남편은 폐결핵과 간질까지 겹쳐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가난한 살림에 병원은커녕 약을 사는 것도 여의치 않았던 송 할머니는 지극정성으로 간호했지만 남편의 병세는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결국 죽음의 문턱까지 오고 말았다. 송 할머니는 눈앞이 캄캄했지만 남편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자신의 생살을 도려내 남편에게 먹였다. 그 후 3일 밤낮을 잠만 자던 남편은 기적 같이 눈을 떴고 아들이 장성해 결혼할 때까지 오랫동안 가족의 곁에 머물다 편안히 눈을 감았다.

송 할머니는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다리의 흉터를 내보이며 “어렸을 때 살을 베어 먹었더니 죽을 사람이 살았다는 소리를 듣고 당시 나도 내 종아리 살을 베어 먹였다”고 슬며시 말을 내려놓았다.

부모 된 사람의 가장 어리석음은 자식을 자랑거리로 만들고자 함이란다. 내 자식이 이런 사람이야 하고 자랑스럽게 말하지 말라는 얘기다. 최근 들어 “연예인이다” “예술인이다” “스포츠 선수다”라며 자식을 뒷바라지에 모든 것을 투자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기러기 아빠니 딸, 아들 바보니 하는 말들은 모두 이런 풍토에서 나온 것이리라. 그렇게 잘나고 유명하게 키워 놓으면 그 자식들이 부모를 제대로 섬기던가.

그러니 부모 된 사람의 가장 큰 지혜로움을 자신의 삶이 자식들에게 자랑거리게 되게 하라하지 않던가. 불초(不肖)는 그래서 나온 말이다. 아버지 요임금을 닮지 않은 아들 단주에게서 비롯된 말이 불초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전해온다. 생명체는 반드시 부모를 닮게 되어 있다. 그러니 부모를 닮지 않으면 불초자식이 되는 것이다.

지아비에게 살을 베어 먹이는 어머니를 본 자식이 무엇을 닮고 어떤 흉내를 낼 것인가. 겨울이 깊어가는 이즈음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지금 자식에게 무엇을 닮게 하고 있는지, 어떤 흉내를 내게 할 것인지를 말이다.

저작권자 © 세종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