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재찬

아니, 정말 내가 다혜와 함께 있었나?
그건 함께하고 싶은 나머지 마음속에서 그려본 꿈이었다.
따뜻한 햇살과 정갈한 모래, 바닥까지 비치는 청정해역과 종려나무의 그늘. 하얀 피부와 특이한 하얀 춤, 그렇다. 그걸 보고 싶은 나머지 꿈을 꾸다 걸린 열병이야. 내가 꿈에서 본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가 꿈에서 본 내가 된 것인가…
 
자신을 취하게 하는 호접지몽은(胡蝶之夢)은 자각몽(自覺夢)의 일종이었다. 자각몽은 꿈이 진행 중일 때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상태인 것이다. 자각몽 속에서는 꿈을 마음대로 연출할 수 있다. 나비가 되어 날아다닐 수도 있고 꿈에 그리던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꿈의 감독과 주연이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비라도 한번 흠씬 맞아보고 싶었다. 햇살에, 청량한 공기에 노출되고 싶었다. 바닥이 비치는 투명한 바닷물에, 아니 마음이 투명하게 비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 몸과 마음을 담가보고 싶었다. 천국은 아니어도 천국 냄새를 좀 풍기는 곳. 따뜻함과 맑음과 시원함이 있는 곳을 함께 간직하고 싶었다.
사랑이라는 거대한 도전의 암벽을 회피하고 싶었다.
누가 이런 내 몰골을 본다면…
자신의 불행은 자기 연민을 더욱 부추기고 슬픔은 또 다른 슬픔을 부른다. 그렇게 다혜를 늘 곁에 두고 마음대로 재단하는 몽유병자가 되어 갔다. 악마의 무리들 몸속에 버티고 앉은 무수한 욕망이 재빨리 눈을 뜨고 찢어발겼다.
‘멕베드’,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적인 사랑과 죽음도, ‘햄릿’의 열정도, 내 곁을 떠나 버린지 이미 오래야. 나에게 남은 것은 오직 설다혜 뿐…

닫힌 커텐 사이로 강렬한 아침 햇살이 물들였다. 흐트러진 이불 위에 알몸인 채 뒹굴고 있는 ‘푹’꺼진 배위로 커튼 사이를 뚫고 나온 햇살이 수직으로 길게 뻗쳤다. 몸을 접을 수 있다면 상반신과 하반신의 정확히 이등분되는 점이다.
만일 어느 쪽이든 한쪽만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어느 쪽을 택해야 할까…
‘축’ 처진 성기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몸을 비척이며 다시 성기를 잠옷 속으로 묻어 버리고 중얼거렸다.
“왜 오랫동안 낫지 않는 것일까…”
가수면 상태에서 꿈과 환상을 넘나들면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상황을 경험했고 이를 치유하기 위해 꿈속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천장 속에 나타난 가상현실, 객체는 침대 위에 누워 마치 꿈을 꾸듯 이미지가 상황에 따라 현실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왜곡 대거나 변형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열이 가슴과 머리 쪽으로 올라가면서 폐, 기관지, 인후, 콧속까지 모두 마르는 것이다. 믿기지 않는 다혜의 환영이 점차 뚜렷한 현실이 되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강렬하고 산뜻한 컬러의 옷을 걸치고 미소를 띠웠다. 시간은 멈춰주질 않았다. 채 1분도 안 되는 동안에 다혜는 밀고 들어왔던 침대를 다시 천천히 빠져나갔다.

보낼 수 없는 마음은 눈물로만 남았다.
“음…”
굳게 닫힌 입가로 옅은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늘 웃던 그 모습 이었어, 하지만 왠지 쓸쓸해 보였어…, 외로움에 빛깔처럼…

모서리진 슬픈 추억을 다시 갖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네가 어떤 모습이든지 사랑한다.”
핏기 없이 초췌한 모습으로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목을 길게 뺀 해변의 가냘픈 종려나무처럼 열병을 앓다 꿈속에서 본 다혜였어, 악몽에 빠져 다시 병이 되려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추운 밤을 지새우며 새로운 다혜의 탄생을 고대하며 잠을 청하곤 했다.

나는 이처럼
그대의 짐을 진 채
무거운 짐
선 뜻 건네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만남과 이별은 공존하는 것
뜨거워지는 눈시울
하늘만큼 높아만 보이는
당신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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