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효교육원장 부근 최기복
외국인을 보면 때로 부끄러울 때가 있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뭐 하나 안 그런 것이 없지만 부모를 섬기는 것도 이젠 그렇다는 이야기다.
토인비가 ‘한국의 효’를 말하고 마르코 폴로가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한 말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아니 대놓고 우려먹었다. 마치 그것이 전부인양.
하지만 그게 어디 다인가? ‘강남 괴담’이 돌고 ‘아기를 때려 죽여 가방에 넣어 물에 던지고’, ‘자살할 때 아이들을 꼭 동반하는데’ 그래도 효고, 동방예의지국인가?
요즘 모 방송국 코미디 프로그램에 “뭐하겠노~”라는 말을 빌자면 “OECD회원국이면 뭐하겠노~”, “국민소득이 2만 불이면 뭐하겠노~”, “버럭 오바마가 한국교육을 본받으라고 하면 뭐하겠노~”. 겉으로만 그렇듯 하고 속으로 썩으면 화타가 와도 못 고친다. 그러니 이젠 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대선으로 온통 나라가 어수선한데 후보들은 인성교육이나 효에 대해 언급조차 안 한다. 물론 입에 들어가는 것이 있어야 뿌리도 찾고 그래야 효도 생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먼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아니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 것,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 그 핵심에 효가 있다는 사실을.
효마저 중국에 넘겨주면 이젠 한국의 정신과 근간은 다시 찾아오지 못할 것이다. 다소 말이 커졌지만 일본인 며느리의 효 이야기를 생각하면 결코 커진 이야기도 아니다.
온통 낯설고 거기다가 감정까지 좋지 않은 나라 일본, 그 나라의 여인. 그 나라에서 시집 온 일본인 며느리가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하고 3년 전부터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남편을 대신해 갖은 농사를 지어가며 세 딸을 모범생으로 키워내고 있다.
남편은 먼저 한국으로 시집간 친구의 친구가 소개한 한국 농촌의 노총각이었다. 1년이 넘도록 몇 십 통의 편지가 대한해협을 넘나들었고, 꿈에 그리던 얼굴을 마주하러 한국과 일본을 오가기도 했다.
그러던 1997년 미야자키 히시마(43)씨와 이진기(46)씨는 드디어 결혼식을 올렸다. 일본 자동차회사에서 사무를 보던 일본 여성에게 강원도 양양에서의 농사일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데다 한국식 농사의 힘든 과정은 정말로 견디기 어려웠다. 시부모의 따뜻한 보살핌과 믿음직한 남편의 사랑이 그 힘듦과 어려움을 이겨내게 했다.
세 딸을 낳고 행복하게 살던 일본인 며느리 미야자키씨에게 축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2004년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이 갑자기 앓아누웠다.
처음에는 감기 몸살이려니 했는데 복통과 고열에 구토까지 하는 바람에 서울 아산병원에 실려 가서야 뇌수막염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열은 40도까지 치솟았고 한 달 넘게 의식을 잃은 남편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처지가 됐다.
“내가 남편을 너무 좋아해서 결혼한 건데요. 아프니까 더 사랑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차분한 말투였지만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늙으신 시부모와 어린 세 딸, 시력 청력을 잃은 남편을 돌봐야 하는 험난한 시련을 극복해야 했기 때문이었으리라.
남편이 하던 느타리버섯 공장은 일본인 며느리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남았다. 남편에게 나오는 1급 장애인 생활보조금으로는 대가족을 이끌어야 하는 일본인 며느리 가장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액수였다.
거기다가 2005년 일본에 있는 친정아버지가 뇌종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외동딸인 자신마저 한국으로 시집와 홀몸인 아버지였다.
친정아버지를 위해 일본으로 돌아가자니 못 보고 못 듣는 남편과 어린 세 딸, 늙으신 시부모가 잡아매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절박한 처지.
그러나 일본인 며느리는 당차게 일어섰다. 친정아버지를 한국으로 모셔와 다섯 달 동안 지극정성으로 모셔 편안히 영면할 수 있었고 남편과 세 딸, 늙으신 시부모를 수발하면서 거뜬히 농사일을 해냈다. 2007년 농협 ‘효’행상 대상은 그래서 일본인 며느리에게 수여된 첫 상이었다.
“남편의 손가락으로 손바닥에 글을 써서 대화해요. 효행상 받는다고 했더니 축하한다고 했어요”
얼굴에 수줍음이 배어나오는 미야자키 일본인 며느리. 그 며느리를 보면서 참으로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