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재찬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아름다운 머리, 한쪽에 꽃을 꽂고서 정면을 응시하던 눈망울, 가슴을 살짝 가린 윗옷, 그 아래 드러난 곡선, 기다란 손가락…, 긴 머리카락과 쭉쭉 뻗은 팔, 몸을 흔들며 춤을 췄다. 머리칼은 나폴 됐고 어깨는 반짝였다.
하늘로 들어 올린 팔에서 풀려나고, 브러시로 머리를 빗고, 향수냄새가 나더니 이윽고 눈앞에 나타난 것은, 큼직한 꽃들이 날염돼 있는 하얀 천으로 몸을 가린 천사였다. 하늘은 눈 시리도록 파랬고, 화산 꽃 같은 빨간 옷을 입고 휘황한 광채가 이는 가운데로 한 여인이 우뚝 서있었다. 내가 손을 들면 그녀가 손을 들었고 내가 움직이면 그녀도 동일한 각도와 속도로 몸을 움직였다.
바로 구름이 몰려들어 달을 가렸다. 달을 기다리며 그녀는 흰 수의(壽衣)로 갈아입었다. 슬픔이 깃들인 듯한 거인들, 그 앞에서 그녀는 다시 파스텔론 녹색 옷을 입고 나타났다.
달은 나오지 않고, 어둑어둑한 그 공간 속에서 긴 시간을 말없이 보냈다. 그리고 그녀는 신비롭게도 가랑비를 맞으며 떠났고, 구름 사이로 섬광처럼 달이 튀어나왔다.
채 1분도 되지 않는 찰나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이후 달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순간 붉은 화산 꽃이 깊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신비롭게 사라졌고 인연은 거기에서 그쳤다.

“안돼! 안돼! 다혜! 다혜야!”
온몸이 땀으로 질펀했다.

마흔다섯.
울컥 설움이 올라오는 나이다. 45라는 숫자는 그에겐 비참한 끝으로 다가왔다. 절망에 가깝다. 좀 무모하지만 순수한 열망들은 오그라들고 결과에 대한 집착과 욕심만 부풀어 오르는 나이가 아닌가. 한 인간의 불안과 초조로 쌓여가는 소리가 그를 짓눌렀다. 왜 이토록 다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댄단 말인가.
“휴우…”
마치 논두렁에 가뭄이 심하여 건조하게 되면 논바닥이 갈라지는 것과 같이 조여 왔고, 오싹오싹 추우며 전신이 아프고 머리가 아프면서 가슴이 울릴 정도로 통증이 왔다. 콧속에서부터 기관지까지 건조한 느낌이었다. 급히 냉수를 단박에 ‘벌컥’ 들이키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바짝 말라있는 폐와 기관지를 촉촉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정신을 가다듬어 되살리고 싶지 않은 꿈을 차근히 되짚어갔지만 차가운 달빛만이 칩칩하게 앙상한 몰골을 비췄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사실 ‘생각하는 남자’일 뿐이다. 이 벌거벗은 채 몸을 잔뜩 웅크리고 한 손으로 턱을 괸 남자는 이 세상의 온갖 고뇌를 혼자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보라 이는 바다 같기도 하고 꿀벌이 드나드는 벌집 같기도 한 외벽. 가시덤불에 갇혀 바늘 크기만큼이나 길쭉하고 날카로운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가시에 찔리는 움찔한 순간. 꽃들이 흑백으로 아우성쳤다. 꽃들은 무채색이었다. 색을 잃어버린 채 숯처럼 타버린 장미꽃잎은 금이 갔고, 조그만 충격에도 금 새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타오르는 정열을 머금은 새빨간 장미는 어디로 가버렸다. 색(色)을 잃었다.  한여름 투명한 아침이 조각났다.
“색을 분간하지 못했어. 그래서 잃었어…”
두 눈 가득 잿빛 슬픔이 녹아내렸다.
“그래 내가 꽃, 포도나무, 올리브 나무들로 둘러싸인 곳에서 닭울음소리, 새들의 지저귐, 나비들의 날개 짓을 들었어…”
쓰디쓴 고백이 뼛속 깊이 사무쳤다. 인생의 덧없음, 무상. 탄화(炭火)된 눈을 통해 본 세상은 처연했다. 만개한 꽃의 아름다움 속에 이미 앞으로 다가올 종말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다혜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떠난 뒤 다시 오지 않았다. 어쩌면 앞으로 영영 되돌아오지 않을지도, 설다혜, 당신도 나처럼 슬프게 방황하며 살고 있는지…, 그렇게 그리움이 더 깊고 못 견딜 것 같으면 이런 시도 한 줄 읽을 수 있을 거야.

밤에 홀로 눈뜨는 건 무서운 일이다
밤에 홀로 눈뜨는 건 괴로운 일이다
밤에 홀로 눈뜨는 건 위태한 일이다

아름다운 일이다.
아름다운 일이다.
왕망(汪茫)한 폐허에 꽃이 피거라!

다혜와 함께 한다면 그 멍에가 좀더 가벼워지지 않을까. 이렇게 당신의 향기를 남길 바엔 남은 향기마저 모두 가져갈 것을…, 그 남은 향기에 숨조차 쉴 수 없어 고통에 몸부림치다 밤하늘의 별들에게 남은 당신의 향기 실어 보냅니다.
 
송산은 몇 해 전 단편소설을 쓰면서 쓰라린 추억을 떠올려야 했는데 온통 설다혜 생각으로 뒤범벅이 되어 자신의 혼미한 정신을 도저히 가다듬을 수조차 없어 중단하기까지 했다. 아마도 설다혜는 송산이 작가로 살아가는 한 가장 훌륭한 모델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가장 많은 이름으로 작품 속에 남을 것이다. 이제 송산은 설다혜로 하얀 원고지를 수없이 채워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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