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재찬

오로지 한눈 한 번 안 팔고 외길을 걸은 좀 우직하다고 할 수도 있고, 끈기도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내.
첫 인상에 대뜸 무반(武班)쪽이라고 말하고 싶다.
곧게 서서, 의지적으로 보이는 콧날과 꽉 다문 얄팍한 입술이 특별히 학반(鶴班)은 아니도록 느끼게 하니까 말이다.
당년 사십대의 송산은 인상과는 전혀 달리 아주 사근사근하고 단정한 신사인 것이다. 그리고 그 신사는 세상에서 가장 공손하고 매너가 넘치는 문인으로 저음의 선이 굵은 목소리를 가진 문단계의 기린아인 것이다.
그는 이따금씩 무릎에서 가만히 주먹을 말아 쥐곤 했다. 오늘따라 저렇게 점잖고 남자답게, 온화한 미소를 짓고, 편안하게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어림도 없는 소리다.
후덕한 인품과 참을성과 흔들리지 않는 줏대는 아니더라도 그런 깍듯함이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자리인 것이다. 아무튼 그에게 있어 대단한 인내와 낙천(樂天)이 또한 필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그 바탕위에 스스로 많은 노력을 쌓고 생각을 쌓았을 것만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한겨울인데도 춥지 않은 것은 반드시 이상 고온이나 대연회장의 난방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런 좋은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끼는 온기 때문이 아닐까.
유리창 서편으로 넘어가는 햇살이 설핏 그의 어깨를 어루만져가고 있어 어쩌면 푸근하게 느껴지는 그런 시각이었다. 그는 자신의 시집 출간과 더불어 생신 축하연을 위해 대연회장을 가득 메운 단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빙긋 웃으며 거침없이 말을 내뱉었다.

“바쁘신 와중에도 이 미력한 인간의 생신기념 시집출판을 기해 축하연을 열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평소 자신과 그리고 자신의 직분에 충실한 사람, 이런 사람들이 바로 세상이 필요로 하는 인물의 본(本)이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남의 눈에 잘 뜨이지 않으면서 언제나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 묵묵히 톱니처럼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범접할 수 없는 눈부신 황금나무의 고결함을 상징하는 그를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과 그의 한마디를 기다리는 수많은 눈초리, 그에게 거는 기대, 그리고 그가 담아내야 하는 또 하나의 거대한 일기당천(一騎當千)의 기상은 영웅호걸의 기백 못 지 않았다.
“…대체 문단의 원로가 무엇입니까! 가면을 벗고 절필하세요! 당신들이 이룩해놓은 게 무엇이 있습니까!”
 그러나 송산의 갑작스런 돌출 발언에 하객들은 당황해하며 여기저기서 웅성대고 불쾌한 얼굴을 지어보였다.
“예전의 이육사, 한용운, 이상, 윤동주, 정지용…, 수없는 선현들이 이룩해놓은 업적을 지금의 원로들은 오직 부귀영화에만 혈안이 되어 어줍 잖은 글 몇 개 써놓고 문인입네 하고 있습니다.“
송산은 의연히 목청을 돋구었다.
“그 깐 알량한 명함에, 추잡스런 몇 개 직함을 알리려 값싸게 문학을 팔아먹고 있습니다! 이 어이 도탄할 일이 아닙니까! 옛 선현의 배고픔에 굴하지 않는 그 의연함은 다 어데로 내팽개쳐버렸나요! 이 민족과 독립운동에 그들은 혈혈단신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들은 선각자로서 한 점 부끄럼 없이, 이름 없는 만주벌판에서 침략자의 총칼 앞에 장렬히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놈의 현실은 뭡니까! 나는 세상이 개 좃 같아 마약을 해야 했고 씨팔, 쓴 놈의 백알을 들여 마시며 글쟁이로 살아왔단 말입니다!”

문단계의 거목, 송산은 강렬한 카리스마로 하객들을 압도 했다. 가녀리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눈빛, 손짓, 말 한마디에는 당찬 힘이 서려 있었다. 점점 목청은 높아갔고 급기야 오른손을 ‘쾅’하고 단상을 향해 크게 내리쳤다.
“쌍놈의 노벨문학상 하나 수여 받지 못하고 있는 이놈에 비참한 문단의 현실 아닙니까! 이 썩어빠진 문인 나부랭이들은 물러나고 우리 문단에도 개벽의 새 시대가 열려야합니다. 천지개벽의 새 시대가 와야 한단 말입니다!”
이제 몇 마디를 내디딘 송산은 무대 위의 그 무엇보다도 강렬했다. 송산은 웅성거림 속에 목청을 더욱 높여 거침없이 시를 낭송했다.
“나의 이 외침, 열정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겁니다!
절필의 미!
실익에 눈이 어두운 원로 문인들이여!
치사한 굴종이 아니라 고차원의 절필을 하라!
소신, 기백은 좋다.
우겨본들 한계 인 것을 냉담한 반응뿐 인 것을
어서 냉철히 깨닫으라!
문단 사에 헛헛한 위선의 탈을 벗어라!
원로여!
제발, 절필하라!
절필의 미를 보여라!
오늘날 이 비참한 문단의 현실을 접하노라면, 저는 눈물과 콧물이 얼고, 내 마음까지 얼어붙는 것 같습니다. 거칠수록, 험난할수록, 제 열정과 노력, 땀뿐만 아니라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은 칼날처럼 매섭게 살갗을 베는 바람을 맞더라도 절대 변치 않을 겁니다!“

그에게선 어딘가 야인(野人)의 풍모가 풍긴다. 해맑은 웃음 뒤에 간간이 비치는 날카로운 눈매.
혹자는 외로운 거목 송산을 이렇게 평했다.
그는 문단계에 만연한 파벌문화에서 유일하게 벗어난 인물이다. 그러나 워낙 탄탄한 실력 덕에 아무도 함부로 그를 대하지 못해 왔다. 주먹계로 치면 혼자 움직이면서도 결코 넘볼 수 없었던 ‘시라소니’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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