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효교육원장 부근 최기복

불이 그리운 때이다. 겨울이 다가오니 따뜻한 것이 자꾸 당긴다. 그런데 따스함만큼이나 불은 훨씬 더 위협적이다. 불하니 얼음 지치던 생각이 난다.

예전에는 겨울놀이가 마땅치 않았었다. 물댄 논이나 저수지에서 얼음을 지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변변치 않은 썰매를 가지고 얼음을 지치다 보면 흔히 물에 빠지곤 했다. 빠졌다기보다는 일부러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고무다리라고 해서 얼음이 약간 녹아 물렁하면 그곳을 썰매를 타고 넘어가는 재미가 보통은 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미도 잠간, 물에 빠지면 혼날 것이 두려워 작은 불씨를 둘러서 양말과 옷가지를 말려야 했다. 그런데 재질이 나일론이다 보니 잠간만 한눈을 팔아도 여지없이 구멍이 났다. 그러면 집에 가지도 못하고 주위를 서성일 때의 눈물은 지금도 잊질 못한다.

친구 녀석들도 그때는 왜 그렇게 야속했는지 지 집으로 뿔뿔이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배는 고픈데다 추위에 오돌오돌 떨기를 여러 번. 도저히 참지 못하고 눈물을 쑥빼고 들어가면 어머니는 의례로 반기셨다. 왜 이제 오냐고 한참을 기다렸다며 그 부드러운 손으로 눈물을 흠처 주셨다. 어머니는 그래서 늘 잊질 못하는가 보다.

지금도 화재가 종종 발생하지만 예전에는 불도 많이도 났었다. 대부분이 초가집이다 보니 한 번 화재가 나면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또 약이나 병원도 흔치 않았으니 화상도 심했다.

그래서 동네마다 얼굴이 일그러졌거나 손발가락이 없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심하게 놀리거나 멀리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가족이 그랬을 때야 어떻게 하지 하고 놀릴 수 있겠는가.

그런데 요즘은 다르다. 많이 배우고 더 현명할 텐데도 사람을 참으로 무시한다. 친부모 형제도 무시하는데 남에게야 오죽할까.

부모의 외상이 남다르면 절대 그냥 넘어가질 못한다. 심지어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으려 하지도 않는다. 아버지의 화상을 끝내 이해하지 못한 자식들의 이야기가 쉽게 잊혀지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일그러진 얼굴로 평생을 숨어 살아야 하는 아버지가 있었다. 아들과 딸이 있었지만 심한 화상 때문에 거둘 수 없어서 고아원에 맡기고 시골의 외딴 집에서 홀로 지내야 했다.

아버지가 자기들을 버렸다고 생각한 자식들은 다시는 아버지를 보지 않겠다는 원망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너무나 자식이 보고 싶었던 아버지는 화상도 잊은 채 자식들 집을 찾아왔다.

자식들은 경악해 했다.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진데다가 손가락은 붙거나 없는 채였다. 자식들은 차라리 고아라고 여기던 때가 더 나았다고 생각하면서 아버지를 외면해 버렸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고 자식들은 성장해 결혼도 하고 가정도 꾸렸지만 아버지와는 전혀 무관하지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부음소식이 전해왔다.

아버지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자식들은 별로 슬픔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래도 낳아준 아버지의 주검마저 외면할 수가 없어서 시골집으로 찾아갔다. 마을 노인 한 분이 문상을 와서 간곡히 부탁을 했다.

아버지는 평소에 버릇처럼 화장이 싫다고 말했고 뒷산에 묻히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식들은 산에 묻으면 명절 때마다 찾아와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각나서 화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장례를 치르고 온 자식들은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해 태우기 시작했다. 막 책들을 끌어내 불 속에 넣을 때였다. 아버지의 빛바랜 일기장이 눈에 띠었다.

그래도 대수롭지 않게 불 속에 넣었는데 갑자기 뭔가가 뒤를 잡아당겼다. 그래서 얼른 불이 채 다 붙지 않은 일기장을 꺼냈다. 그리곤 연기가 나는 일기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일기장을 읽던 아들의 손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여보! 내가 당신을 여보라고 부를 자격이나 있는 놈인지조차 모르겠소. 그날 당신을 업고 나오지 못한 날 용서하구려. 울부짖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당신만 업고 나올 수가 없었소. 이제 당신 곁으로 가려고 하니 너무 날 나무라지 말아주오. 덕분에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다오. 비록 아버지로서 해준 것은 없지만 말이오…”

그리고 자식들에게 남긴 편지도 있었다. “보고 싶은 내 아들 딸에게. 평생 너희들에게 아버지 역할도 제대로 못하고 이렇게 짐만 되는 삶을 살다가 가는구나. 염치 없지만 한 가지만 부탁한다. 내가 죽거들랑 제발 화장은 하지 말아다오. 나는 불이 싫단다. 그러니 제발…”

아들은 일기장을 부여안고 통곡을 했지만 이미 그곳에는 아버지의 주검마저도 연기로 사라진 뒤였다. 부모는 절대 못난 자식이라고 홀대하지 않는다. 그런 부모를 조금만 닮아간다면 겨울로 가는 이 계절이 그렇게 스산하지 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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