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군지’가 전하는 전설들을 읽다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있다.전월산의 버드나무가 흔들릴 때마다 괴화산 자락 여인들이 바람난다는 전설이 대표적이다. 그 같은 것을 보면“전월산과 괴화산 자락의 주민들을 이간질시키려는 전설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금강을 사이에 둔 양쪽 주민들을 다투게 하는 일로 이득을 보려는 세력이 만든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연기군지’을 편찬한 분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전하는 기록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연기대첩연구’는 더 한다.옛날에 오랑캐들이 나타나 닥치는 대로
아버지는 이를 ‘비사교적 사교성’이라고 표현했다.인간에게는 사회를 형성하고자 하는 성질과 자신을 개별화, 고립시키는 성질이 모두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혈연관계 친구관계, 애정관계를 모두 혐오했던 아버지는 혼자 철학에 몰두했다.아버지는 예순 무렵에는 집에 매일 손님들을 초대해 열띤 대화를 나눴다.하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농밀한 인간관계를 증오해왔다.아버지는 생태적으로 ‘비사교적 사교성’을 실천해온 자신의 일상과 인생론을 위악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직설적인 필치로 적고 있다. 나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연인, 부모-자식, 친구, 사
괴화산에는 ‘금전굴’이라는 전설도 있다.괴화산 자락에 마음이 착하여 선동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착한데다 부지런하여 나날이 재산이 불어났다. 하루는 건너 마을에 사는 형이 선동이를 찾아가서“동생 내가 100석짜리 논을 사는데 99석만 빌려 주게.”부모의 유산도 독차지했던 형이 100석짜리 논을 사겠다며 99석을 빌려 달랬다. 그저 달라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선동은“축하드립니다.”형이 요구한대로 빌려드렸다.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형을 도울 수 있어 행복하다며, 다음날도 밭에 나가서 열심히 일한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
초인, 그 정반대의 존재가 말인(末人:der letzte Mensch)이라고 하여 대립시켰다.이에 대하여 말인은 자기 초극의 의지(意志)도 힘도 창조적인 생명력도 잃어버려 평균화하고, 더구나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쾌락에만 빠지는 하찮은 인간이라는 것이다.이러한 초인의 세상은 그의 ‘짜라투스트라는 말하였다’중에서 말한 것을, 초인의 구체상(具體像)은 짜라투스트라이고, 그리스도교에서의 신(神)에 대신하는 인류의 지위자이며, 민중은 그의 복종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니체의 주인사상은 그 후 나치에 의해 곡해(曲解)된 적도 있다. 아버
종시 연기군 금남면의 반곡리·석삼리·장재리·석교리가 둘러싼 곳에 201m의 괴화산이 있다. 금강을 사이에 두고 전월산과 마주하는 산이다. 밤에도 초롱을 걸어 놓은 것처럼 환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다.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오는 명당을 초롱을 걸어놓은 것 같다는 괘등형(掛燈形) 명당이라고 하는데, 괴화산의 모양이 그렇단다.그것만이 아니다. 과화산에는 많은 금이 묻혀있단다. 그래서 산자락에 사는 주민들은 매년 10월 1일이면 맛있는 음식들을 차려 놓고“우리들에게 복을 내려주세요.”절을 하면 소원을 빌었다. 그래서 그런지 모두가 행복했
신무산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은 북으로 향하다 부용산 자락에 이르자“서남에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자”홍익의 정신으로 방향을 바꾸어 장남평야를 적시며 흐르기 시작한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여들어 집을 짓고 살더니 홍수를 막겠다며 토성을 쌓아 올렸다. 그리고 나성고개 나성재 등으로 부르며 금강에 오가더니 한자를 빌려다 나성(羅城)으로 표기했다.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그곳에 고려의 충신 임난수의 덕을 기리는 독락정이 금강을 내려다본다.옛날에는 충청남도의 문화재였으나, 2012년 7월 1일에 세종특별자치시의 출범에 따라 지금은 세종특별자치시의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만 봐도,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남들이 들어가 볼 수 없는 경지에 들어가 견딜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그리고 이 사랑이 가져다주는 선물이 바로 인내다.아마도 사랑과 인내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구분할 수 없는 신비한 합일(合一)이다. 일그러진 얼굴과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땀은, 인내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이라고 묵묵히 그리고 감동적으로 외친다.인간은 왜 이렇게 자학하는가? 인내가 인간 승리의 표상인가? 이 기분이 진짜일까? 진짜라면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가장 고난 받
조국을 지키려는 애국지사들의 의병활동이 들불처럼 번졌으나 관리들의 무능과 양반들의 탐욕으로 조선은 망하고 만다. 우리가 문명과 문화를 전해주고 일러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이다.옛날에는 풍신수길이 조총을 들고 나타나 금수강산을 쑥대밭으로 만들더니, 1910년에는 이완용 같은 친일파를 앞세워 조선을 집어삼켰다.임금과 관리들을 믿은 백성들은 왜놈들한테 모든 것을 빼앗겨 살아갈 길이 없어, 만주로 일본으로 떠나야 했다. 그때 일본으로 건너간 동포의 후손들을 재일동포라 한다.재일동포는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민단과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으로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까닭에 그것을 위해 글을 써야 했다.”이렇게 말했을 때가 아버지 나이 47세다.“나는 손에서 펜을 놓는 날까지 이 정신으로 니체를 탐구하고, 쓰고, 세상에 알릴 결심이다.”그 때가 아버지의 나이는 69세다. 나도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으려고 참 많이 노력하며 사는데, 그런데도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라며 무뎌지고 느슨해진 나를 자주 발견한다.나는 그 당시 어두운 숲속을 헤매며 한 줄기 빛
“내 생애 중 가장 많은 글, 절정기만큼 근사한 니체를 써낸 때였지…”니체는 아버지를 의연하게 지탱해주는 힘이었다.“니체를 연구하면 어떤데요?”“그럴때면 난 훨훨 날고, 글을 쓸 때면 난 불꽃이 튀었어.”“그래요. 아버지께 처음부터 끝까지 빠지지 않는 것은 니체예요.”“글을 쓸 때면 난 죽음을 왼쪽 주머니에서 꺼내 벽에 대고 던졌다가 튕겨 나오면 다시 받는다.”지옥 같은 곳, 스스로를 괴롭힐 만한 건수가 널려 있는 연구소에 가지 않으면, 아버지는 우울해지고 글 쓸 기력마저 없어진다고 고백했다.“거기 나가 있으면 죽음에
의병장 임대수는 어려서부터 머리가 좋고 몸이 튼튼하여 못하는 것이 없었다. 예의가 발라 동내 어른들을 만나면“진지 드셨습니까.”바르게 인사하고 무거운 짊이라도 들고 계시면이고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나는 젊었거늘 돌이라도 무거울까늙기도 서럽거늘 짐조차 어이 지실까낭랑한 목소리로 시조를 읊으며 짐을 날라 드렸다.그뿐 만이 아니다. 친구들을 돕는 일도 좋아했다. 같이 뒷산에라도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다리가 아프다는 친구가 있기라도 하면 집까지 업어다 주기도 했다.“장비의 몸을 한 유비다.”동네 어른들은 임대수를 곧잘 ‘삼국지’에
제 한 몸의 이익을 놓고 계산하는 삶이 아니라, 사람다움의 가치를 향해 목숨을 던지는 삶이 아닌가! 사랑할 수 있는 것만 사랑하는 게 무어 사랑인가!사랑 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진짜 사랑인 거야!문득 사랑을 꿈으로 바꿔본다. 만약 단기간에 이뤄질 수 있는 것만 꿈꾼다면, 이미 그것은 꿈이 아닐 테다. 쉽게 이뤄지지 못할 것을 꾸어야 진정한 꿈이 아니겠는가? 꿈이 되어버린 이 순간에서 꿈을 말하는 것은 슬프다.지금 굳이 침을, 고인 침을 기울여 연필심에 묻히는 것은, 그 두꺼운 심을 녹이려는 뜻도 있어. 그냥 단맛, 쓴맛, 짠맛을
임대수 열사의 공덕비를 열심히 읽던 학생 하나가“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떵떵 거린다면서요.”옆에서 부동자세로 공적비를 응시하는 선생님에게 묻는다. 선생님이 고개를 돌려 학생을 보는데 씁쓸한 표정이다.“어느 일간지가 독립운동가의 후손 115명의 수입을 조사했더니 200만원 미만이 43.0%로 가장 많았고, 100만원 미만이 20.9%, 50만원 미만이 10.3%였단다.”선생은 신문에 난 기사를 학생에게 설명하더니. 독락정 뒤로 돌아가는데 외로워보였다.“혹시. 의병장의 후손이 아닐까?”그런 생각에 뒤따라 가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하는데도 조정의 관리들은 파벌 싸움만 하고 있었다.나라가 망하든 말든 백성들은 굶어주건 말건 관심이 없었다. 그야말로 탐관오리들의 천국이었다. 참다못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 동학농민운동이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살려고 일어난 것이다.그런데 조선의 임금님은 아버지와 황후의 갈등을 수습하지 못하여, 일본군대가 멋대로 동학혁명군과 싸우겠다며 들어오는 것도 막지 못했다. 그래서 농민군은 무능한 관군만이 아니라 최신무기로 무장한 왜군과도 싸워야 했다.맨손이나 마찬가지인 농민군이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지만, 농민군들
민주화 25년, 한국의 사회상황은 어떠한가. 고용과 직업 안정성, 소득 불평등, 노인 자살, 가정 폭력, 이혼, 저출산, 우울증…. 어떤 지표를 봐도 오늘의 삶이 너무 위태롭다.어디 하나 희망적인 데가 없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수많은 중대 사안이 제기만 될 뿐, 책임 있게 해결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는 일이 반복될 까….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모국어 사용에 제약이 많던 때에 문·사·철(文·史·哲)을 겸비하며 꿈을 키웠다.또 해방을 맞은 후 문단에서 본격적으로 아버지와 더불어 나도 작품을 해왔다는
카페를 뒤로하고 봉준이와 아쉬움의 작별을 했다. 서글픔. 마음이 그대로인데 또 어떻게 끝낼 수 있을까. 마지막도 아니고 끝도 아니다.계속 이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과 잠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것, 내게 마감이란 그런 것이다. 마감처럼 손을 들어 친구에게 인사한다.“또 보자…”설명할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 말해보겠다는 과감한 선언이나 용기, 집착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여명의 입구 앞에 서있다.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봉준이 앞에서, 다시 내가 자신을 바라본다. 내가 나를 바라본다.지도나 질서 따위로 측량할 수 없는
금강의 도도한 물줄기를 내려다보는 곳에, 고려의 망국을 애통해 하며 낙향하다 전월산 자락에 자리를 잡았다는 임난수의 덕을 기리는 독락정이 있다.일대를 ‘나릿재 역사공원’으로 부르기도 했으나 지금은 ‘나성동 독락정 역사공원’이라 한다.뒤로는 세계의 중심을 실현하는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라 살벌하기도 하지만, 의병장 임대수의 공적비가 서있어 숙연하다.만주벌판을 달리던 독립투사들의 심정으로 미래로 설계하는 자에게 방향을 알려 주는 것 같다.의병장 임대수는 꺼져가는 조국을 지키려고 항거했던 애국지사이다.그로 인해 연기 지역에서는 일본에 항거
환경부 4대강 조사평가단은 세종보 해체를 발표했다.그러나 이춘희 세종시장은 현재의 상시개방 상태를 유지하더라도 보 해체와 비슷한 효과를 거둘 수 있으므로 현 상태를 유지한 채 모니터링을 조금 더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는 이유를 들어 유지를 밝혔다.이를 두고 세종시에 적을 둔 시민단체와 정당은 세종시청 앞에서 철회를 촉구했다.(세종교육희망네트워크, 세종YMCA, 세종YWCA, 세종여성, 세종참교육학부모회, 세종참여자치연대, 세종환경운동연합, 정의당 세종시당 등).또한 한겨레 신문은 환경부가 세종보 해체를 권고했는데 난데없는 이춘희
독락정의 오른쪽에 의병장 임대수의 공적비가 있다.임대수가 명치제국의 침략에 맞서다 순국하신 의미를 보다 잘 알려면 ‘명치’라는 연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연호란 군주가 바뀌는 해부터 사용하는 것으로 우리는 ‘서기’를 사용한다. 왕조에서는 ‘무슨 왕 몇 년’이라 했다.중국은 여러 왕들을 거느리는 최고의 왕을 ‘황제’라 했기 때문에. 황제가 즉위할 때마다 연호를 새로 정하고, 모든 왕들은 그것을 사용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역을 꾀한다는 의심을 받아,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기도 한다.그런데 우리나라 왕 중에서도 연호를 사용한 왕이 있었다
1980년대 초, 어느 가수가 애절하게 읊은 시월의 마지막 밤이 다가오고 있다.가사의 한 대목처럼 우리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오래전 시월에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는 경구를 체현한 어느 독재자의 최후를…그리고 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전투경찰의 군홧발에 짓밟힌 대학의 캠퍼스가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진 1985년 시월의 마지막 밤, 어느 대학의 건물에 갇혀 있던 1000명 이상의 학생들에게 ‘공산혁명분자’라는 딱지를 붙여 연행한, 1986년 시월의 마지막 밤을…그때와는 한참 달랐으면 하거늘, 공작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