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장학회는 불법 헌납된 것이었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위원회는 2005년 7월 22일 부일장학회(현 정수장학회) 헌납과 경향신문 매각 의혹 사건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박정환 국가 재건 최고회의 의장의 지시에 의해 수사되었음이 당시 중앙정보부 지부장이었던 박용기씨의 진술에서 확인되었지. 쿠데타 이후의 안갯속이야.”1962년 6월 20일 김지태가 구속상태에서 강압에 의해 작성된 기부승낙서에 서명을 했으나, 이마저도 구속 중 기부의 의혹을 지우기 위해 석방 이후인 6월 30일로 변조되었음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감정에 의해
박정환의 유산. 정수장학회는 2박 3일의 일정으로 전국의 장학생들이 한데 모여 친분을 맺는 자리. 2010년대 중반 들어서는, 장학증서 수여식과 전국 하계 수련회를 동시에 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래서 더더욱 불참하면 안 될 것이다. 이외에 비교적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활동도 있는데, 8월 달의 육영수 여사 추도식 같은 경우이다. 행사 진행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학생들이 모여 자발적인 도우미 활동을 하기도 한다. 청오회 내부의 조직이 잘 짜여져 있는데, 각 지역마다 지회장-부지회장-총무로 이루어진 임원단이 존재한다. 임원단은 보통 장
그로부터 2년이 안 돼서 6·25전쟁이 터졌다. 박정환은 전란 중에 문관에서 현역으로 복귀했다. 그래서인지 박정환은 6·25전쟁 때도 큰 무공을 세운 것이 없는 것 같다. 박정환은 태어나서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진정성을 가지고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 희생하거나, 공을 세우거나, 봉사를 한 적이 없었다. 오직 상처투성이 나라를 만든 독재자였다. 박정환은 휴전 후, 군사쿠데타를 꿈꾸며 자유당 정권 말기부터 계획을 구체화했다. 그러다가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쿠데타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박정환은 합법적으로 무기를
아무리 세상이 어수선해도 봄꽃은 다시 핀다.“모든 사람이 같은 의견이고, 한 사람만 반대의견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할 권리는 없다.”육군소장 박정환 등은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대한민국 헌법을 위반했다. 그들은 장기집권 야욕도 모자랐는지 기어이 1969년 대통령 3선 연임을 허용하는 개헌을 강행함으로써 한 번 더 헌정을 짓밟았다. 더 나아가 19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회에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공화당 의원 중심으로 강행 처리했다. 1948년 제헌 헌법부터 보
푸치니의 ‘나비부인’ 중에 나오는 ‘허밍 코러스’를 기억하고 있다. 여인의 운명을 노래하는 그 낮은 목소리들. 한때 그 ‘허밍 코러스’는 얼마나 내 삶의 창 가까이에 있었던가.길고 긴 기다림의 우수에 가득 찬 그 노래를 듣고 있자면 나는 세월의 주름살을 하나하나 세고 있는 여인을 보는 듯 했었다. 눈이 내리려는 날, 낮에 낮게 가라앉는 하늘처럼 그 노래를 들었었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그 노래를 듣고 싶다.그 시인의 집에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금빛의 날개 같은 은행잎들이 다 떨어지고 나면 첫눈이 내릴 때였다. 이제는 남
사슴이 살았던 시대는 “주름진 조국의 차가운 겨울? 빙하 29도? 역사는 노천”에 떠는 동토의 계절로, “분 바른 식민시의 하늘에? 태양은 슬프게 뜨고 진다”고 하셨죠.절박해진 사슴은 “이제 목자는 없다? 우리 스스로 메시아가 되려 하는 것이다”라며, ‘그 붓으로 기어이 검찰 이겨내고자/ 어둠을 쪼개는 안간힘”으로, “제 몸 태워 어둠 밝히는? 한 자루 촛불”로 승화시키려 합니다. 그래서 “내 땅의 평화와 민주와/ 그리고 하나 됨을 위하여/ 꽃이 꽃으로 피고 노래가 노래로 울려 퍼지는/ 그날을 찾아가는 발걸음/ 그대여/ 다시 떠나지
박정환이 죽기 전날까지 유신체제가 좋다고 떠들던 사람들이 박정환이 죽고 나자, 제 일성으로 한 얘기가 ‘민주적 절차 밟고 개헌하겠다. 긴급조치 해제하겠다’였다. 이게 뭘 뜻하는 것인가? 유신이 잘못된 줄 알면서도 장관이나 국회의원이나 끽소리 못하고 있었다는 얘기다.“나는 당신 생각에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목숨을 걸고 당신의 표현의 자유를 옹호할 것이다.” 자유주의 사상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이건, 자유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다양성이며 이를 보장하기 위한 사상, 표현, 언론의 자유 같은 자유권이다.“
“구국 여성봉사단 문제만 해도 그래. 당시 항간에서 말이 많던 최태민이 총재, 박그녀가 명예총재를 맡고 있었는데 김재규가 국국여성봉사단의 문제점을 보고한 후 박그녀가 총재, 최태민이 명예총재가 됐어.”“박정환이 최태민의 실권을 뺏는답시고 두 사람의 자리를 맞바꾼 거지요.”“김재규는 자기가 괜히 조사를 해서 오히려 개악이 됐다면서 뒷조사한 걸 후회했대요.”“김재규는 구국여성봉사단의 비리외에도 박그녀에게 불만이 믾았다고 해.”“무얼까요?”“박그녀가 지방행사에 참석하면 할머니들이 전부 무릎을 꿇고 절을 했대.”“김재규는 ‘아무리 대통령
“당시 안동일 변호사는 김재규가 박정환과 함께한 만찬 석상에서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과 싸우다가 욱하는 마음에 총질을 했겠거니 생각했다는 거야.” 김재규의 실제 모습은 그렇게 온화하고 겸손할 수가 없었다. 안동일 변호사는 속으로 ‘저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을 살해했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정부장이 맞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재판이 시작된 직후 김재규의 진술을 듣고 깜짝 놀랐대요.”“반체제인사나 할 수 있는 얘기를 했대면서요?”“처음에는 ‘김재규가 변명하는 거겠지’하고 생각했겠고마예.”“한편으로는 김재규의 진술이 당시
(509) 11 보수·친일·유신단죄 51납득할 만한 설명 없이, 연예계에서 힘쓰는 ‘협회’에서 무조건 출두하라는 연락이 가는 것이다. 이런 일로 한두 차례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는 연예계 제작진 사이에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가 완전한 민주정만큼 향상되기 힘들어지고, 사회가 경직화되며 인권탄압과 독재자의 권력과 향락에 빠진다. 10·26이 일어난 곳은 안가(安家)였다. 대통령이 청와대 인근에 비밀 안가를 만들어놓고 질펀하게 놀았다. 대통령의 고정 집무실이 청와대 안에 엄연히 있고, 또 휴식을 취할 장
제국주의, 나치즘, 공산주의, 강압적 독재…. 그래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야만의 올가미 속에서 건져 올린 김재규야말로 20세기가 남긴 가장 큰 성취다. 김재규가 법정에서와는 달리 변호인 접견을 통해 살고 싶은 욕구를 내비친 적은 없다.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유신 기간에 우리 사회에 쌓인 많은 쓰레기를 청소하고 자유민주주의가 이 땅에 뿌리 내리도록 도와주는 일을 수행할 수 없게 된 게 유감스러울 뿐이다”라고 고백했다. 당시 김재규는 사형당하지 않았더라도 얼마 못 살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았다.법정에서 “야수의
슬픔, 기쁨, 두려움, 분노…. 혼자 숨어버리거나 도망치고 싶은 감정. 다치고 상처 입었을 때 흘렸던 눈물과 함께. 당대 최고의 여배우가 사는 아파트로 직접 만나러 간 박정환이 한 아주머니와 마주치게 되고, “어머, 대통령 각하 아니세요?” 이 한마디에 끌려 나와 입단속까지 당하게 되지만, 소문은 퍼지게 되었다. 단순한 소문으로 치부하기 힘든 것이 나중에 이 아주머니가 국가를 상대로 손배소를 냈기 때문이다.“궁정동은 박정환 독재자의 내밀한 욕망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만화경 같은 곳이자, 못된 독재자의 모든 욕
박정환은 그 어떤 쾌변을 늘어놓는다고 하여도 낙제(落第)감임엔 틀림이 없다. 적어도 한 나라를 이끌어 가려면, 행동거지가 올바라야 한다. 소탈하고 서민적이고 검소함에 대한 박정환의 신화는 그러한 포장이 빚어낸 결과의 하나일 것이다. 박정환이 사망한지 수십년이 넘었지만, 당시 만들어진 시스템이 상당 수준 한국 사회의 기축으로 여전히 작동한다. 권위주의적 군사정권이 관료제를 통해 경제성장을 하는 체제였다. 그 결과 재벌이 탄생했다. 효율을 위해 민주주의는 배제되었다. 물론 이후 한국은 민주화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치 분야의 독재자를
문화재란 문화 활동에 의하여 창조된 가치가 뛰어난 사물로서 문화재 보호법이 보호 대상으로 정한 유, 무형 및 민속문화재, 천연기념물, 사적, 명승지 등을 일컫는 말이다.그런데 이들 수많은 문화재들 가운데에서도 보다 가치가 높다고 판단되는 것을 정부는 엄격한 조사와 심의 등 엄정한 절차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로 하여 국가가 특별히 보존 관리하고 있다.그러면 어떤 문화재들이 국가지정문화재로 하여 보호되는가?국가지정문화재란 지정문화재의 한 종류로서 문화재청장이 문화재보호법 제23~26조까지의 규정에 따라 지정하고 있다.국가지정문화재는 국보
또 하나는 홍익대학교 재단이다. 이 재단의 소유자는 독립운동가 출신 이흥수 홍익대 초대 이사장으로부터 사들인 이도영 일가다. 재단 퇴진운동으로 인해 1961년 이사장 자리에 물러나 있던 이도영은 1963년에 다시 복직하는데, 이때 박정희 일가와의 인척 관계가 도와주지 않았나, 라는 의혹이 존재한다. 일부에 의하면, 이도영의 차남 이석훈 재단 전 이사는 육영수 여사의 오빠인 육인수의 딸 육해화와 결혼했다. 육인수 또한 재단 이사를 지냈다. 이들 또한 홍익대 재단 이사장직을 내리 물림하고 있다. 전국에 숨겨진 강탈된 박정환 일가의 재산
독재자 박정환은 3선 대통령 선거 때는 장충단 마지막 선거 유세에서 “이번 선거를 마지막으로 다시는 국민 여러분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읍소해 국민을 속이고 당선됐다. 그뿐만 아니라 선거에서 망국적인 지역감정까지 불러일으키고 금권·관권 등 온갖 부정한 방법을 총동원했다. 박정환은 공화당 최고 선거대책 기구에서 선거 전략을 짜면서 ‘공명선거로는 당선이 쉽지 않다’고 중론을 모으고, 대통령 선거 마지막 유세에서 ‘이번 선거를 마지막으로 앞으로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공약을 해야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
저발전의 원인이 호남 내부에 있을 리 없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환 정권에서 대구·경북(TK) 출신의 네트워크가 공고해졌다. 정부 주도로 경제가 일어서던 시절, 외국 차관은 영남 기업에 집중됐다. 끈끈한 지연·학연에 호남이 파고들 틈은 없었다. 산업화 시절 급속한 도시화에 따라 서울로 이주한 호남 사람들은 허드렛일을 도맡으며 하층 노동자 집단을 형성했다. 전라도 출신이라는 것이 낙인찍기의 대상이 되었다. 이 시선이 축적되며 호남 사람들은 ‘반도의 흑인 또는 아일랜드인’이 되었다. 스스로 절벽에 선 듯한 느낌을 받
각하는 술이 취하면 으레 둘 중 마음에 드는 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그리고 그 다음 일은 경호실장과 이 관립 비밀요정의 담당자만 아는 비화속에 묻혔다. 박정환은 만주군 출신답게 때로는 여자에게 기모노를 입힌 채로 농락하였다. 착실히 썩어가고 썩어가면 썩어갈수록 단 냄새는 진해지고, 몸에서 흘러나와 베개를 적신 것은 땀이 아니라 피눈물이다. 박 정권은 정권에 우호적이지 않은 지식인들을 정리할 목적으로 대학정비사업을 추진했다. 여기에 휘말린 대구대학의 운영자였던 독립운동가 최준은 삼성그룹 이맹희 회장에게 대학을 넘겼고, 삼성 사카린 밀
지난해 미작 농들은 자연재해 없이 사상유래 없는 풍년농사를 거뒀다.자그마치 전국 쌀 생산량은 400만 톤에 육박하는 수확량을 거뒀는데 결국 남아도는 쌀 우선 시장격리 27만 톤에 대한 정부 결정과 시행과정의 정부대책은 농업인들을 또 한 번 울렸다온 국민의 생명산업을 감당하는 쌀을 생산하는 농가들의 매년 농사에 임하는 심정은 어떨까?초고령화에 처한 농촌은 주곡농업인 쌀농사에 의존하고 농업인들 대부분은 그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문제는 도·농의 양극화보다 더 심각한 농촌의 갈등은 대농과 소농의 양극화이자 대부분 주곡 위주 미작농가
박선호: 그 문제는 제가 답변하게 되면 지금 현재 시내에서 일류 배우들로 활동하고 있고, 이것이 역효과가 나고, 사회적으로 혼란 문제가 되고, 돌아가신 분에게 욕되고 했기 때문에 제가 그 문제를 피했습니다.변호사: 지금도 그런 심경입니까?박선호: 예, 그 문제를 가지고 제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변호사: 이번에 한 행동의 숨은 동기 중 혹시 그런 사정 때문에 내 자신의 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잖나, 하는 생각은 없습니까? 이번에 부장님의 명령에 따르기는 했지만, 그 행위에 가담하게 된 사정 속에, 사람의 행동 속에는 무의식중에,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