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볍씨, 직파를 꿈꾸며 아침 일찍 팔순이 가까운 동네 형님이 문을 두드리고 야 단법석이셨다. “오늘 씬나락 넣어야지. 싹이 다 텄어.”시골로 이사 오고 나서도 우리 집 생활 구조는 아직도 도시생활 구조였다. 해가 창문 밖으로 치밀어 올라도 도시로 출근하는 아내와 사무실을 나가는 나는 매일 늦게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되었다. 처음 이사와서는 살가운 동네 사람들이 새벽 6시만 되면 마실을 오는 바람에 거의 파자마 바람으로 뛰쳐나가곤 했다. 지금에야 동네 사람들이 잘 알기 때문에 최소한 8시는 넘어
5 신석기 시대 원인을 알지 못하는 것이 빙하기의 추위였는데, 추위가 풀린 이유도 잘 알지 못한다. 어쨌든 날씨가 따듯해지자 사라졌던 초원이 다시 생기고, 새로 생겨난 동물들이 뛰어다녔다. 이전과 달리 작고 빠른 것들이었다. 물 속에도 고기들이 헤엄치고 조개들이 바닥을 헤집으며 논다.동굴에서 나온 인간들은 좋아하는 사람과 짝을 지어, 물가에 움막을 짓고 살면서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루었다. 남자는 밖에서 먹을 것을 구해오고 여자는 살림을 하며 아이들을 돌본다.조선대륙은 동·서·남이 바다에 접하고
06 황소독을 왜 안 한다는 겨? “황소독을 해야지, 남들 다 하는 황소독을 왜 안 한다는 겨?” 봄이 돌아오자 어머니가 복숭아 나무를 가지고 작년과 똑같은 난리를 퍼부었다. 시골로 이사 와 보니 종중 땅 600평이 산 밑에 버려져 있어 복숭아 나무를 심은 지 3년이 되었다.처음 복숭아 나무를 심을 때도 어머니나 동네 사람들과 엄청 싸웠다. 복숭아 밭에 복숭아 나무를 심으려면 밭을 갈아엎고 깨끗하게 해놓고 심어야지 산같이 버려진 땅에 나무만 심어놓으면 먹는 줄 아느냐고 몰아붙였다.나는 원래 밭을
05 우리집 강아지 똘이와 누리 시골로 이사 오고부터 제일 하고 싶은 일이 강아지 한 마리를 기르는 것이었다. 마침 아랫동네 지붕공사를 해주러 갔다가 거기서 토실토실한 누렁이 한 마리를 사왔다. 진돗개 튀기라고 하는데 정말 전형적인 누렁이였다. 밥을 얼마나 잘 처먹는지 똥글똥글한 게 복덩이처럼 생겼다. 누렁이를 데리고 오자마자 여섯 살 먹은 아들놈이 ‘누리’라는 이름을 지었다. 누리는 밥도 잘 먹고 똥도 얼마나 푸짐하게 누는지 누리 주변은 똥으로 깔려 있어서 지저분하기 그지없었다. 누리를 데리고
3 구석기 시대의 조선대륙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처음으로 태어난 인류는 호기심이 많아 여러차례 탈바꿈을 하는데,꾸부정하게 걷는 단계손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단계허리를 펴고 꼿꼿하게 걷는 단계를 거쳐, 돌을 깨서 일으킨 불을 사용하는 슬기로운 인간(호모샤피엔스)으로 탈바꿈하더니, 결국에는 지금 우리와 지능이 같은 슬기롭고 슬기로운 인간(호모샤피엔스 샤피엔스)으로 진화했다. 호기심이 왕성한 그들은 새로운 것을 보면만져 보고, 갈라보고, 맞춰보고그래야 직성이 풀렸다. 또 사람을 만나면말을 걸어보고, 힘도
04 날라리 농부의 가지치기 시골에 들어온 지 3년째다. 첫해에 들어오면서 종중 땅으로 몇 해 묵은 땅 하나를 구해 복숭아 나무를 심었다. 산 밑에 있는 땅인데 다시 개간이고 뭐고 할 것 없이 풀이 산더미처럼 쌓인 곳에 그냥 나무만 백이십 그루를 심었다. 동네 사람들은 처음부터 농사짓는 걸 가지고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복숭아를 제대로 먹으려면 그렇게 심으면 어떡하냐, 종자는 어떤 게 좋다, 왜 지금 복숭아를 심으려고 하느냐 등등, 옆에서 잔소리 하고 싶은 노인네들이 볼 때 내가 하는 일이란 다
1. 금강 전라북도 장수군 뜸봉샘에서 퐁퐁 솟아난 물방울이 진안, 무주, 금산, 영동, 옥천, 대전, 신탄진, 부강, 세종, 공주, 부여, 강경을 지나 장항과 군산 사이를 빠져 서해로 흘러간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아는 일이다. 금강은 다른 강들과 달리 남에서 북으로 흐른다.구리 향천, 정자천, 남대천, 봉황천, 송천, 보청천들을 보듬어 안고 북서로 흐르다 세종시 부강에서 머리를 북서로 돌려 충청북도 진천, 청주를 거쳐온 미호천을 합강에서 맞이하여 공주, 부여로 흐른다는 것도 잘 아는 일이다.길이
03 뺑소니, 어디다 하소연할 수도 없고 아침나절이었다. 어제 주문했던 컴퓨터가 도착한다고 해서 컴퓨터 책상을 어떻게든 만들어 보려고 버둥대는 중이었다. 어젯밤에 들어올 때 내 차를 앞에 주차해 놓았기 때문에 내 차를 뒤로 이동해 놓고 아내 차를 앞으로 빼놓았다. 아내 차는 학원을 옮기면서 새로 뺀 스타렉스고 내 차 역시 1년밖에 안 된 리베로였다. 리베로는 고등어 살 발라놓은 것같이 생긴 트럭이다. 생긴 게 꼭 그렇지만 이 트럭은 승차감도 스타렉스나 똑같고, 배기량이며 속도도 만만치 않다. 고
02 사라져 가는 풍경들 시골에서는 정월 대보름이 설날보다도 더 큰 명절이다. 오늘 아침나절부터 동네 안내 스피커에서는 이장의 쩌렁쩌렁한 안내방송이 시작되고 있었다. “동네 주민 여러분~ 알려드립니다아~ 오늘은 정월 대보름날이라 동네 청년덜이 동네 어르신분덜을 위해 돼지 한 마리를 잡아 윷놀이두 하구 막걸리두 대접해 드릴려구 합니다아~ 주민 여러분덜은 한 분두 빠짐 이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아~”읍내에서는 달집 태우기 행사가 있고, 연날리기, 깡통 돌리기 등 다채로운 행사를 준비한다고 했다. 작
01 귀향 어머니가 1남 6녀를 홀로 키우시느라고 고생을 많이 하셨다. 남의 식당 일을 다니며 7남매를 다 키우기까지는 억척같은 어머니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우리 고향은 연기군 서면 고복리로 빈농의 식구들이 그나마 의지하고 살았던 집도 고복저수지가 생기는 바람에 고향을 떠나야 하는 실향민 신세가 되었다.그래서 우린 대전에서 10여 년 전부터 어렵게 영세민 아파트를 얻어 살아 왔다. 아내와 아들 둘, 그리고 어머니, 외할머니, 그리고 아직 시집 안 간 여동생 둘, 이렇게 여덟 명이 13평
20년 전에 쓴 귀농일기다. 벌써 20년이란 세월이 지났고, 이렇게 나도 고향에 정착했다.난 쓸쓸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네 살 때부터 20세 초까지 난 말을 안 하고 살았다. 그래서 어렸을 땐 반벙어리 소리를 들으며 살았다.어머니가 네 살 때부터 날 업고 다니며 충남대병원에서 수술비가 없어 담을 타는 게 다반사였다. 국민학교 때는 1년에 거의 3~4개월을 학교에 가지 못했다. 친구들이 가끔 승현이 죽었냐 하는 소문까지 들었다. 중학교 때도 아파서 서너 달 학교에 못 갔는데, 중 2때 오래간만에 학교에 가서 200명 중에 혼자 수
소설을 소설가 혼자 쓰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얼핏 보면 그래 보인다. 이야기를 다루는 직업이 소설가 말고도 많지만, 작가의 손에서 시작해 작가의 손에서 모든 것이 끝나는 장르는 소설이 유일하다. 오로지 혼자서, 서재의 컴퓨터 화면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며 인물을 선보이고,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외롭고 고단한 일이다. 이 업종은 갓 등단한 신인이나 평생을 이 업에 종사한 원로나 모두 동일하다. 그렇지만, 나는 어떤 소설도 나 혼자서 쓴 일이 없다. 나와 함께 소설을 쓴 건 소설의 등장인물이었다. 나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아버지는 언론지 투고 글에서 IMF 사태 이후의 박정환 신드롬을 조선일보, 조갑제, 군사 독재의 후신들 등에 의한 박정환 미화라고 비판하였다. 박정환 시대의 경제 성장은 민주주의 성장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후퇴를 가져왔다.또한, 박정환이 서민적이고 검소한 대통령이라는 주장 역시, 각종 부조리 의혹사건, 3분 폭리사건, 장준하가 폭로한 3분 밀수사건, 전두환 정권 때 밝혀진 김종필의 200억대 부정축재 사건 등으로 볼 때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드롬이 “개발 독재의 단맛을 독점해온 사회 곳곳의 수구적 보수 세력과 특히 그들
세계적으로, 또 후손들에게도 부끄러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아버지는 특히 “‘박정환 향수’에는 기본적인 제반 권리에 대한 무관심, 인간의 고통과 고난에 대한 무감각, 대화와 타협을 통한 문제 해결 방식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잘 살아보세’라는 걸인의 철학 이상의 개인적 또는 공동체적 철학에 대한 무지가 내장돼 있다”며 “바로 박정환 향수야말로 박정환 시대 최악의 유산일 것”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아버지는 “이런 유산들은 박정환 시대에 대한 적절한 판단이 이루어지고 박정환 또한 그의 정당한 몫을 인정받기까지 그 병적인 작용을
경부고속도로, 끊임없이 박정환 치적으로 나오는데 광복이후 일제시대의 기본 산업 인프라의 핵심은 남북교통로다. 한반도를 X자로 가로지르는 철도가 이미 깔려 있었다. 그에 반해 동서 교통로는 거의 없는 셈이다. 목포-부산/서울-강릉/의주-원산 등의 동서 교통로가 언제 생겼는지 생각해 보라.당시에 시급한 건 동서 교통로의 확충이지 남북교통로의 확충이 아니었다. 경부고속도가 비판받아야 하는 건 그런 정책의 우선순위 문제를 무시했다는 점이다. 박정환 옹호론자들은 상당 부분 기초적인 역사 사실을 왜곡하거나, 그 근거가 대부분 박약하다. 이들이
박정환은 궁정동 안가를 만들기 전에는 위장번호를 단 승용차로 밤나들이를 하곤 했다. 당시에는 박종규 경호실장만이 시간과 장소를 아는 비밀에 속했다. 육영수 여사는 별도의 정보망으로 야행을 감시, 꼬투리가 잡히면 경호실장에게 따지고 심한 부부싸움을 했다. 그러나 모두가 못 본체 모른체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정계 관계자들과 연예인 사이에서 ‘매춘’이라기 보다는 주로 ‘상납’ 차원에서 이뤄졌다. 최은희는 삶의 질곡이 평탄치 않은 등 개인적으론 참 불운한 인물이었다. 홍콩에서 북한으로 밀입국한 이유도 박정환 때문이다. 안양
“또 하나의 외적 요인을 들어보자. 박정환 시대에는 갑자기 외화가 쏟아져 들어왔다. 굴욕적인 한·일회담 해 가지고 무상 3억 차관 3억, 총 6억이 들어왔지.”“한국이 일본에 지배당한 대가가 고작 3억, 또 이것이 어찌 박정환의 공로인가요?”“이북은 120억불 요구했다고마예.”“또 월남파병으로 10억불이 들어오고….”“이것이 박정환 공로인가예?”“국군 5천명 죽고, 만명 이상이 부상당하고, 수 만명이 고엽제 고통을 당한 대가죠.”“또 중동건설현장에서 엄청 돈이 들어왔는데, 그게 박정환 덕인가요?”“국제환경과 노동자들의
박정환이 폭력적으로 강제한 일본제국주의식 ‘유신’ 또한 개인의 내밀한 양심까지 지배하겠다는 권력의 의도를 잘 드러낸다. 충성스러운 신민들의 내면을 관리하는 ‘교화’정책이 잘 먹혀들지 않자 일본제국은 폭력적인 전향 정책에 호소한 것이다. 그러니까 양심의 가책과 사과를 법률로 강제할 수 있다는 발상은 폭력을 써서라도 개개인의 사상과 양심을 통제하겠다는 일본 제국주의 전향 제도를 계승하고 있는 셈이다. 일제의 사상전향 정책은 1945년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이어졌다. 일제의 전향자 관계단체인 보도연맹을 그대로 본뜬 이승만 정권의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유정회)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하고, 대법원장과 법관도 대통령이 정하고, 국회해산권, 중요정책의 국민투표 회부권, 기타 막강한 대통령의 비상대권까지 손에 넣었다.김일성을 능가하는 독재 권력 합법화 조치가 완결된 것이다. 완전한 정상의 비정상화였다. 박정환에게는 통일에 대한 생각도 의지도 없었다. 그저 직선제를 피하고 대통령 자리를 유지하는 최선의 선택이 북한의 김일성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박정희와 김일성이 서로 내밀하게 약속한 것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꼭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7·4남북공동성명
벼 수확기를 맞이한 농협RPC에 빨간불이 켜졌다. 지난해 이어 자연재해 없이 쌀농사는 대풍작을 맞이했지만 흥겨운 풍년가를 못 부르는 생산농민과 속앓이 하는 농협RPC의 속내는 따로 있다.1977년 이후 45년만의 대폭락의 쌀값사태를 겪고 있는 생산농민과 미곡 유통을 감당하는 농협RPC로서는 수확기인 요즈음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먹고사는 쌀 가격 안정의 심각성을 때 늦게 인지한 당정은 앞 다투어 처방을 내놓고 있다.하지만 각각의 해법이 다르고 항구적인 식량안보 산업의 근본적인 정책이나 대안마련 없이 땜질식 임시처방으로 일관할 경우 모